詩와 산문 <90>
詩와 산문 <90>
  • 국토일보
  • 승인 2013.02.22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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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봉현(前 한국기술사회 사무총장)님의 산문집 ‘대통령 과학기술 대통령님’을 연재합니다

남강에 떨어진 꽃송이

임금이 내려 준 논개의 호는 의암(義巖)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거친 풍랑 속에서 십팔 세 꽃다운 여인의 귀한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충정이 항일 독립만세를 이끈 유관순 열사와 비견된다.
논개는 본디 양반 가문에 태어난 예쁘고 재기 발랄한 규수였다. 할아버지 전대까지는 함양 땅에 살았다. 살아버지가 산 좋고 물 맑은 장수 고을로 이사해 주촌 마을에 정착했다. 논개는 아버지 주달무와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에 태어났다.

희한한 사주는 논개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이름의 논(論)은 낳다의 사투리요 개(介)는 술(戌)의 머리 음으로 ‘개를 낳다’의 뜻이나 옛날에는 이름을 천하게 부르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지은 것이란다.

주달무 내외는 십칠세의 건장한 아들을 먼저 보낸 불덩이를 가슴에 묻고 살았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우뚝 솟은 장안산 삼신할미께 간절히 빌고 빈 끝에 사십 넘은 박씨가 잉태해 무남독녀로 세상에 나왔다. 귀한 늦둥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모님 심정의 일단이 논개란 이름에 담겨 있다.

논개는 아버지가 훈장인 서당에서 사내애들과 어울려 글공부를 했는데 재주가 뛰어나 사내애들을 압도했다 한다. 그러나 운명은 사람의 힘으로 어쩌지 못한 것. 아버지가 해수병을 얻어 아내와 어린 딸의 극진한 간호에도 아랑곳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논개의 기구한 삶은 시작된다.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며 나무를 해 나르고 어머니와 함께 힘든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더 비참해 진 것은 노름꾼인 숙부의 간계로 논밭을 빼앗겼다. 종내는 모녀도 모르게 금품을 받고 부잣집 병신에게 시집가도록 올가미를 씌웠다. 논개 나이 열 넷, 모녀는 이 올가미를 벗어나려고 밤중을 이용해 육십령 험한 길을 넘어 안의현 외가댁으로 피신했다. 숙부 또한 큰 일 낫다고 어디론가 줄행랑을 쳤다.

그러자 재물만 날리고 며느리를 맞이하지 못한 김풍헌은 관가에 고발장을 내어 처벌을 호소했다. 이년 뒤에 모녀는 장수현으로 끌려 온 몸이 됐다.

장수현 최경희 현감은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돈으로 며느리를 취하려던 김풍헌을 벌하는 한편, 모녀의 정상을 참작해 어머니께 종살이 이년을 부과했다. 논개는 어머님의 쇠약한 건강을 하소연하며 자신이 종살이를 대신하겠다고 간청해 승낙을 받았다.

이런 기구한 상황과 만나면 나는 회의 하곤 한다. 신은 있는 것일까? 구원의 하느님은 있는 것일까. 착한 소녀에게 그처럼 가혹한 짐을 지우는 것은 전생의 업인가 절대자의 시험인가. 최경희 현감 부인 또한 병약해 남편 시중들기에 한계를 느꼈다. 부인은 예절과 겸손, 지식까지 겸비한 열여섯의 논개에게 현감의 수발을 맡기고 고향 화순으로 떠났다.

종살이 의무기간이 끝나자 논개는 자연스럽게 최현감과 동거생활ㅇ에 들어갔다. 처음엔 두근거리고 두려웠으나 반복의 생활은 여유와 의연함까지 갖춰 달콤한 부부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감미로운 꿈같은 날은 잠시 일장춘몽이었다. 열여덟 나이에 왜군이 쳐들어 와 국토를 짓밟고 노략질을 해댔다. 이에 최현감은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금산 무주 장수 일대에서 왜군을 물리쳐 빛나는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돼 창원으로 부임했다. 논개도 뒤따라 말 한필을 구해 남장으로 변장하고 임을 향해 가다 왜군에 붙잡혔다.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조선군의 반격으로 구출돼 창원으로 합류했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로운 전선에서 사랑에 빠질 여념이 없었다. 진주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최경희 장군은 김천일 장군과 함께 군.민이 하나가 돼 적과 싸우기 현전 칠일, 피아간에 수많은 희생을 내고 중과부적으로 무너지니 패장이 된 김천일 최경희 두 장수는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절한 뒤 스스로 산화하고 만다.

아! 이을 따라가지 못한 논개의 가슴은 찢어질 듯 적개심으로 불탔다. 남편과 조국에 대한 복수할 일념으로 기생의 명부에 올려 주기를 스스로 간청해 진주기생이 됐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렵사리 최경희에게 의지하며 사랑의 불꽃을 태우다 또다시 임을 잃은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왜를 물리쳐 나라를 지키고자 한 굳센 의지의 최경희 장군 충정심은 논개에게 전이 돼 목숨을 건 결연함 앞에 어떤 장애물도 달려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다.

“의 있는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칼날을 밟는다.” 죽는 길이 임의 품에 안기는 것이지.
스스로 기생이 된 논개는 은장도를 가슴에 푸고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끼었다. 비장한 마음을 다지고 왜군의 진주성 함락 축하연에 끼어들었다.

무르익은 연회와 가무 속에 침 흘리며 다가선 왜장 모곡촌을 힘껏 껴안고 남강에 뛰어내려 장렬하게 생을 마친 것이다. 사백오십여 년 전 남강에 떨어진 아름다운 꽃송이 논개. 임은 갔어도 우리들의 가슴에 또렷한 겨레의 꽃송이로 남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원점으로 돌아가는가. 삽백오십 여년 뒤에 일본제국주의의 그물에 다시 옭아 메이고 말았다. 수 없이 많은 겨레의 희생으로 삽십육년 만에 벗어났는데 여전히 신경을 끄지 못하게 한다.

왜나라는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를 넘본다. 그런 터에 저 남강에 떨어진 꽃송이는 우리역사 교과서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로한 분들이 있다. 달빛에 가물거리며 야사에만 맴도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