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한잔의 여유] 남태령(南泰嶺)
[茶 한잔의 여유] 남태령(南泰嶺)
  • 국토일보
  • 승인 2012.12.1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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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연 태 혜원까치종합건축 대표이사 / 한국건설감리협회 회장

남태령(南泰嶺)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더 자세하게는 사당역에서 과천을 넘는 고개가 남태령(南泰嶺)이다. 도로 사용량이 많다보니 일제 때부터 확장을 거듭해 왕복 8차로 큰 길이다.

과천쪽에서 사당쪽으로는 시내도로가 막혀 고개를 넘으면서 거의 언제나 정체가 심하지만, 사당에서 과천 쪽으론 막힘없이 소통이 원활하다. 과천쪽이 원활하다보니 내리막길을 과속으로 달리다 과천쪽 내리막 끝에 쯤에 있는 60km 제한 과속단속기계에 찍혀 과태료를 물기도 여러 번이다.

고개의 가장 높은 부분엔 큰 돌에 남태령의 이름이 새겨 있고, 과천8경 중 하나인 ‘과천루’라는 망루가 건너편 숲 앞에 세워져 있고, 동서고금을 통해 고갯길(嶺)의 꼭대기는 언제나 군사적 요충지라서인지, 관악산 쪽엔 수도방위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으며 산 속에 많은 군사시설이 유지되고 있다.

고개 넘어 과천은 30여년 전에 정부 제2청사가 지어져 7개 부처의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 정부청사가 지어진 것은 청사의 북쪽 면에 위치한 관악산이 막아 주기 때문에 이북에서 곡사포든 직사포든 공격을 하여도 자동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서라고 한다.

그 과천의 정부청사가 이번에 이전을 하게 됐다. 6,000여명의 공무원이 한꺼번에 행복도시로 나가고, 공무원과 관련된 수 많은 방문객이 없어지다보니 과천의 공동화문제로 상권이 크게 위축될 거라는 많은 걱정들을 한다. 하지만 부처가 나간 뒤에 다른 기관들이 들어오기에 상권의 위축은 크게 없을 것이다.

다른 기관이 들어오기 전에 오래된 현재의 건물을 보수보강 해야 하기에 공사기간동안 공동화문제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겠지만, 마침 필자가 중앙건설심의위원이라서 얼마전 중심委에서 정부청사의 보강보수공사를 빨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심의를 했기에, 후속기관이 바로 들어와 근무하면서 동시에 공사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과거에 이 고개는 하삼도(三南:충청.전라.경상)를 도보로 통하던 유일한 길이었고, 한때는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지극한 효성에서 아버지의 묘소로 다니던 길이었다. 당연이 길은 양방(兩方)이다보니 지방에서 서울에 올 때도 이 길을 이용하게 되는데, 걸어다니던 시대엔 이 고개 입구인 과천만 도착해도 드디어 서울에 당도했다는 안도와 감격이 서린 길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가서 길걸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도 생겨 난거 같다.

남태령은 관악산과 우면산이 연결되는 곳으로 수목이 울창하고 후미진 곳이 많아 관악산을 넘나드는 여우가 많이 출몰하다보니 여우고개(狐峴)라 불렸다. 특히 천년 묵은 여우가 나타나 무고한 사람에게 소의 탈을 씌워 소로 만들어 부려 먹곤 했다는데 그 저주에서 풀려나는 것은 무우를 먹는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고려조의 공신(功臣)이요, 명장(名將)인 강감찬(姜邯贊)이(근처인 낙성대역이 그의 출생지이다) 이 고개를 지나가다가 여우들의 장난이 너무 심해 크게 꾸짖어 호령하기를, ‘네 여우들이 다시 이 고개에 근접을 하는 날이면, 너의 족속은 모두 멸종할 줄 알라’고 한 이후로 다시는 여우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오는 이들이나 장사치를 터는 도적들이 자주 출몰해 과천현감은 젊은 현리들을 파견해 행인들을 호위해 주었는데, 현리들은 나중에 호위해 준 댓가를 요구해 행인들은 일명 ‘고갯넘이돈’을 별도로 준비했다는데, 그러다보니 한편 ‘도적고개’라고도 불리웠다.

남태령을 조선시대 지리서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어떻게 소개돼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니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류와 문화가 넘나드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한양에 들어서는 대표적 관문인 남태령이 택리지에 왜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택리지는 정조임금이 남태령을 넘기 전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 때 발간된 책이어서 그런가 보다.

대신 우리의 고전인 ‘춘향전’의 어사출도 대목에 등장한다. ‘청파역 말 잡아 타고, 배다리를 넘어 동작이를(지금의 동작동)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 급히 남원으로 가야 하는 이도령의 급한 마음이 잘 표현돼 있다.

사실 남태령 고개는 높이 183m로 다른 령(嶺)이라는 칭호가 붙은 고개보다 아주 낮다. 우리가 령이라 부르는 명칭은 해발 800m 이상의 고갯길에 붙여지는데, 큰 산맥을 넘는, 예컨데 백두대간을 넘는 대관령, 한계령, 미시령, 추풍령, 죽령, 조령, 육십령 등을 령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남태령을 령이라 부른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하루는 정조대왕이 수원 화산에 모신 사도세자의 능원에 행차하실 때 이 고개에서 어가(御駕)를 멈추고 잠시 쉴때,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한 촌로(村老)에게 넌지시 고개의 이름을 물으니,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옵나이다” 하고 즉석에서 고개의 이름을 아뢰었고, 그때 임금을 수행하던 관리가 이 고개의 이름을 알고 있던 까닭에, 너 어찌 거짓 이름을 대었느냐며 크게 꾸짖었다.

“어찌하여 남태령이라 했는고”하고 정조께서 촌로에게 거짓 이름을 댄 사유를 직접 묻자, 촌로는 “죽을 때가 되느라고 그랬사옵니다. 상감마마께 감히 거짓을 아뢰고자 한 것이 아니옵고, 이 고개는 원래 도적고개 또는 여우고개이오나, 상감께서 물으심에 그런 쌍스러운 이름을 알려 올릴 수 없었고, 이 고개가 서울서 남쪽으로 오면서 맨 처음 있는 큰 고개이기로 그리 아뢰었나이다”라고 답했다.

정조께선 촌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는 잠시 가졌던 노여움을 풀고, 촌로를 오히려 가상히 여겨 주지(周知)란 벼슬을 내리셨고, 이 고개를 남태령(南泰嶺)이라 부르도록 공식화 해주었다고 한다. 그 촌로는 과천에 살던 변씨(邊氏)라 전해지며, 변씨(邊氏) 일족이 아직도 남태령 부근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의 확장공사로 남태령 옛길은 없어졌지만 과천 쪽으론 1km 쯤 옛길이 남아 최근에 길의 보수공사를 마쳤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그 옛길 옆에 도랑물과 작은 계곡도 있고 우거진 숲이 있어 한적해 천천한 걸음으로 걸을만하다.

과천에 있는 정부 청사가 국토해양부 부터 이전해 행복도시에서 근무를 한다. 학교에서 건축공학을 배운 필자도 그동안 업무를 겸해 국토해양부에 숱하게 드나들었다. ‘고자 처가집 드나들 듯 한다’는 속담처럼…

국토해양부엔 가까운 친구도 있고, 비록 업무를 통해 알게 됐지만 오랜동안 정들다 보니 가까운 친구보다 오히려 더 정이 든 관료들도 많다. 집이 서울에 있는 이들이 충청도의 행복도시에서 근무하다보니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모쪼록 행복도시의 주거시설이 빨리 완비돼 이들의 불편이 적어졌으면 한다.

이제 이들이 행복도시로 이사를 가면 국토해양부에 업무를 위해 자주 찾던 필자도 이 남태령을 넘는 일이 많이 줄어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