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談事談]2022년 건설산업 최선책은 무엇인가!
[時談事談]2022년 건설산업 최선책은 무엇인가!
  • 국토일보
  • 승인 2022.05.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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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규 교수/강원대학교

[時談事談(시담사담)-이 시대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2022년 건설산업 최선책은 무엇인가!

김 선 규 교수
김 선 규 교수

4,500년전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 쿠프왕은 2,000년 후 그리스 헤로도토스가 그가 잠든 피라미드를 파르테논 신전, 바빌론의 공중정원 등과 비교하며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라 칭송할 줄 몰랐을 것이다. 쿠프왕은 그저 그가 죽은 후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그 시대 믿음으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히길 원했고, 그것을 위해 그가 가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했을 따름이다. 그 시대에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2,400년 전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들은 2,000년 후 영국 세익스피어에 의해 그들의 작품세계가 계승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민주주의가 태동하며 자유로운 상상으로 가득했던 도시국가의 생활상을 묘사한 것이고, 그 시대 관중들을 열광시켰을 뿐이다. 그렇다고 세익스피어가 본인이 400년 후 인류 역사상 최고의 극작가로 칭송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는 그저 그 시대를 섬세하게 그려냈을 따름이다.

2,500년 전 석가모니나 공자가 2,500년 후까지 그들의 사상과 철학이 계승될 줄 몰랐을 것이고, 2,200년 전 진시황은 그가 통일한 중국이 곧바로 멸망하리라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2,000년 전 대가야의 김수로왕은 그의 자손들이 김해 김씨로 번성해 최다 성씨를 차지하게 될 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세종대왕은 500년 후 그가 창제한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로 평가받을 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그들은 그 시대에 최선을 다했고, 그 시대에 빛났던 게 전부였다. 우리는 그 시대를 현재(Present)와 비교하며 구시대(Old Age)라 일컫는다. 그런데 그건 착각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대는 동시대(Contemporary)라 부르는게 맞다. Contemporary는 사전적으로 Same Age(당대) 또는 Modern(현대)을 의미한다.

왜 과거(Past)를 구시대가 아닌 동시대라고 해야 하는가? 4,500년 전은 4,500년 전의 관점에서, 2,000년 전은 2,000년 전 관점에서, 500년 전은 500년 전 관점에서 평가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사상과 관례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사상과 관례가 지금과 다르다고, 구시대를 현재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그 시대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빛이 났다면 그 자체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쿠프왕은 그 시대에 충실했을 뿐인데, 현재 기준으로 그가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난할 것인가?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인과 예를 따를 것을 주장했는데, 현재의 기준으로 MZ세대 의식과 다르다고 평가절하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시대에 최선을 다했고 그 시대에 빛났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며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하다가, 20세기 들어와서야 활짝 꽃을 피웠다. 그렇다고 세종대왕에 반대한 세력들을 비난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도 그 시대에 최선을 다한 것이다. 동시대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몫이다. 다만 후대의 평가는 영원하지 않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동시대의 행위 중 빛나지 않는 사례도 많다. 대체적으로 독재권력, 전체주의 권력 하에서 인류 역사는 불행했다. 정복전쟁에서 항복하지 않으면 몰살시켰던 징기스칸, 홀로코스트의 히틀러, 정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스탈린이나 김일성 등은 동시대를 암흑으로 탈바꿈시켰다. 요즘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광기도 이에 속한다. 어디 푸틴만인가? 종신집권을 꿈꾸는 시진핑, 터키의 에르도안, 북한의 김정은도 마찬가지다. 이들 외에도 현재 진행 중인 동시대의 저평가 진상들은 징글징글하게 많다. 이들은 동시대의 빛을 가리고 있다.

정치분야와는 다르게 과학기술분야에서 동시대의 활약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결코 사그라드는 법이 없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로부터 고대 인도와 중세 아랍의 과학자들, 근세 들어 유럽에서 무수히 등장한 뛰어난 과학자들, 그중 영국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그 시대 최고였다. 그의 이론은 현대에 와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해 수정되었다. 그렇다 보니 뉴턴의 이론이 잘못된 것이라며 평가절하하는 무뢰한도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뉴턴은 그 시대에 최선을 다한 것이고, 동시대를 밝게 빛냈으며,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동시대 최고였다. 뉴턴은 동시대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는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언젠가 수정될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렇게 인류는 발전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뉴턴처럼 동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될 것이다.

이따금 디스커버리 채널의 ‘How to Work Universe’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시간관념이 무뎌질 때가 많다. 출연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의 시간 단위는 최소 광년이다. 예컨대, 태양과 가장 가까운 항성인 프록시마까지 거리가 4.22광년으로 약 40조km 떨어져 있는데, 지금의 우주선 속도로 11만년 걸린단다. 이건 약과다. 우리 은하의 중심 궁수자리 A*까지는 27,000광년 거리고, 우리 은하와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는 250만 광년 떨어져 있으며, 허블로 관측된 가장 먼 은하는 130억 광년 떨어져 있단다. 도무지 시간과 거리를 분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태양은 60억년 후에는 초신성 폭발로 사라질 것이고, 40억년 후쯤 지구는 팽창된 태양에 흡수되며 잡아먹힌단다. 결국 인류는 최대 40억년 후에는 영원히 사라질 터이다. 아니 100년 후, 1,000년 후도 예상 안되는데 40억년 후라, 거기까지 걱정해야 되나?

우리가 우리의 자손들을 몇 대까지 돌볼 수 있을까? 아마 증손자 까지가 최선이 아닐까 싶다. 그나마도 증손자 쯤까지 가면 우리가 그들을 돌보기보다, 그들이 우리를 돌볼 가능성이 높다. 증손자로 따지면 대략 육칠십년 터울이다. 그렇다면 100년 후를 예견하고 대비하는 것은 무리다. 정성을 다해 우리 자식과 손자까지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이 최선일 듯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동시대는 이제 이삼십년 밖에 남지 않은 셈이다.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하며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면 된다. 그것이 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다. 남은 시간이 짧아지는 만큼 기력은 쇠해지므로 더욱 힘에 부칠 것이다.

젊은 시절, 건설은 시스템과 절차, 법·제도만 제대로 갖춰지면 잘 굴러갈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마 건설이 다양한 사람들과 기술들이 어우러지는 장이라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시스템과 절차라는 화두를 놓아서는 안 된다. 그 화두가 건설의 발전과 미래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건설은 환경에 매우 민감하다. 따라서 동시대의 접근방법은 특히 중요하다. 동시대 최선의 기술과 기법, 시스템과 절차, 법·제도를 찾아내야 한다.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후대가 다룰 문제다. 지금 당장 건설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대 최선의 방안을 찾아내는데 집중해야 한다. 한쪽의 목소리, 한 방향의 쏠림을 경계하며, 동시대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결국 우리 건설도 동시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