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측은지심
정조의 측은지심
  • 국토일보
  • 승인 2010.04.05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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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환의 세상만사] (주)삼미 대표이사 / 공학박사 / APEC 공인컨설턴트 / 기계기술사

우리나라는 입법, 행정 및 사법의 3권 분리제도가 정확히 명시돼 있지만 견제라기보다는 정치논리에 종속되는 변질된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하여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이는 국가지도층의 견제 기능이 상실돼 국리민복의 기본정신이 훼손되는 현장과 가능성이 매스컴을 통해 자주 보도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에라도 제도적 모순이 지도자들의 애민 사상을 해친다면 다음 글을 참고하여 溫故知新의 교훈으로 삼기를 기대해본다.

다음 글은 ‘홍재전서’ ‘일득록’에 나오는 것으로 부산대 강명관 교수의 글을 편집한 것이다.

1793년 어느 날 경연(經筵)에서 곡식 5만 포(包)를 보내달라는 제주목사의 요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전라관찰사는 전라도 일대에 저축해 둔 곡식이 많이 줄어들었고, 또 제주도는 호구가 3만 호밖에 안되니, 5만 포의 절반만 보내주면 된다고 보고해 왔다.

정조는 “저 섬의 굶어 부황이 든 백성들이 밤낮 먹여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만약 반을 줄여주라고 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찌 실망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바닷가 고을의 형편도 전라도에서 아뢴 바와 같으니, 제주도 백성 때문에 전라도 바닷가 고을에 해를 끼칠 수도 없다. 도신(道臣, 관찰사)이 올린 보고서대로 3만 포를 빨리 실어 보내도록 하라. 나머지는 내탕고의 돈을 내어 주겠다.”

5만 포를 다 보내되, 전라도 바닷가 고을에 피해를 끼칠 수 없으니, 임금의 개인 재산(내탕고)에서 돈을 내어 2만 포를 보충해 주겠다는 것이다.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니 잠을 이루지 못하겠다.

이렇게 기민 구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노라니, 어느 덧 새벽 4시다. 이러다가는 밤을 꼬박 새울 판이라, 신하 한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를 청했더니, 정조의 말인즉 이렇다.

“아침에 전라 감사의 보고서를 보았는데, 제주에 기근이 들었다고 알려와 나리포창(羅里浦倉)의 곡식을 배로 실어 보내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굶주린 섬 백성들이 먹여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불쌍해 잠시도 잊을 수가 없다.”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하고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아마도 제대로 된 왕의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다. “곡식을 꾸리고 배에 실어 나르는 바닷가 백성들은 또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시퍼런 바닷물에 배를 타고 노를 젓는 그 수고로움이 눈에 삼삼하여 절로 눈을 붙일 수가 없구나.”

제주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곡식을 가져다주려면 전라도 해안가 백성들이 또 시퍼런 파도를 노를 저어 건너야 한다. 그 백성들의 고생이 눈에 삼삼하여 왕은 절로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측은지심이 가득한 왕은, 곡식을 실어 보낼 때마다 처마 끝에 혹 바람 소리라도 스치면, 한밤중에도 불을 켜라 하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린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이유를 그는 다시 밝힌다.

“백성이 굶주리면 나도 굶주리고, 백성이 배가 부르면 나도 배가 부르다. 저 섬의 수만 명 백성들이 천 리 먼 곳에서 자신들을 먹여주기를 바라고 있고, 또 몇 백 명 뱃사람이 멀리 깊은 바다를 건너간다. 이런 때 한 줄기 바람, 한 방울 비라도 고르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편히 잠들고 싶어도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는가? 도신과 수령들이 나의 이런 마음을 헤아린다면, 섬 백성들도 따라서 살아날 것이다.” 정조의 이 말이 입에 발린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끌어나가는 정치인과 모든 지도층 인사들이여 정조대왕의 마음을 항상 되새김하시기를 간절히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