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 <5>
[안동유의 세상만사] <5>
  • 국토일보
  • 승인 2013.11.29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동유 팀장 / 대한설비건설공제조합 법무보상팀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 설비건설공제조합 법무보상팀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팀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팀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환향녀와 지못미, 그리고 화양연화(花樣年華)

아베 일본 수상의 최근 망언을 비롯 일본 각료들의 망언이 극에 달한 느낌이다. 일본 극우 세력들의 망언이 2차대전 패망이후에도 자주 등장하여 한일 간의 문제를 어렵게 한다. 독도 등 영토 문제와 역사 문제를 넘어서 요즘은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망발을 일삼고 있다.

침략자를 살해한 것이 어찌 단순한 살인범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를 분노케하는 것은 정신대 위안부 문제이다.

국제적으로 성노예로 규정돼 참혹한 인권 유린의 실례로 공분을 느끼게 하는 일임에도 일본은 반성은 커녕 위안부가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밀다가 위안부의 존재가 확인되자 정부가 개입한 적은 없다고 사적인 영리 도모를 하는 장사꾼들의 일로 치부하고 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위안부들이 강제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먹고 살기 어려워 스스로 몸을 파는 매춘부처럼 그 일에 뛰어 들었다고 강변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간 어떤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어린 나이에 총칼에 밀려 강제로 일본군의 노리개로 능멸당한 것도 억울한데 창녀 취급이라니…
그 죄를 어찌 다 씻으려고 일본 극우 각료들의 망언이 줄을 잇는단 말인가?

그런데 아이러니는 우리나라에서 시대의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돌아 본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동안 환향녀 취급을 하고 멸시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뜻있는 몇몇이 우리가 외면하고 있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조명하고 사회문제로 또 시대적 문제로 부각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는 쉬쉬하고 있다가 기껏 80년대나 돼서야 공론화하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최근 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소송이 승소로 판결돼 젊을 때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했던 피해를 일본 기업에 배상받을 수 있게 됐다.

그들의 피해 내용 중엔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 왔을 때 위안부로 오인 받아 이혼당하고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았다는 것도 있다. 그 만큼 성적인 문제는 예민하고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의가 아닌 강요에 의해 유린당한 젊음과 순결이지만 남에 의해 저주와 멸시를 받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죄인은 아니잖은가? 그들은 피해자지 죄인이 아니다.

 

환향녀! 그렇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란 뜻이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환향녀다. 그러나 환향녀란 말엔 말뜻 그대로의 뜻보다 훨씬 복잡 미묘한 뜻이 숨어 있다.

청나라에 잡혀 갔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 온(돈으로 풀려 나거나 도망쳐 나온) 부녀자들을 부른 말이 바로 환향녀다.

고향으로 돌아 온 여자.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남자는 참 비겁한 존재였다.

자기 여자들을 지켜 주지도 못했으면서 몸을 더럽혔다는 구실로 그들을 더러운 여자로 죄인 취급하며 멸시하여 수많은 여자들을 자살하게 하거나 떳떳한 사람 구실 못하고 죄인으로 숨어 살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의 여자들이 그런 수모를 면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거나 잡혀간 여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죄 없는 이들을 같은 여자이면서 근거 없는 우월감으로 멸시하고 능멸했다.

어쩌면 이것이 더 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위로 받고 마음의 안식을 얻어야 할 이들을 정신적으로 철저히 유린하고 자신들은 더 순결하고 정숙한 여자로 행세하며 차별한 것이다. 동족에게, 같은 여성에게 까닭없이 멸시받는 것이 더 큰 설움으로 작용한다.

그들을 경멸하며 부른 말이 환향년이다. 환향녀를 더 차원 낮은 욕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특히 화를 면하고 이 땅에 남아 있던 여자들이 그렇게 부르며 자기의 운좋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선민처럼 특권 의식으로 그들을 이등 국민 취급했다.

이 환향년이란 말은 일반적인 경멸의 욕으로 바뀌어 이후로는 바람피운 여자를 매도하는 말로 바뀌었다. 서방질하는 여자를 환향년, 그런 일을 환향질이라 해 발음조차 화냥년, 화냥질이 돼버렸다.

우리가 지켜 주지 못해 남의 나라에 끌려가 삶을 유린 당하고 온 사람들이 어찌 그런 불순한 일의 대명사가 되었는가? 그만큼 우리의 의식에 그 일이 부정한 것으로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고려 때는 몽골에 공녀로 여자들을 바치고 정권을 유지했고 청나라 때 정묘,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많은 여자들을 이국 땅에서 오랑캐의 노리개로 능멸 당하도록 무기력하게 대처했다. 무기력의 극치라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일이 근세에 와서 일제 시대에 수많은 일본군 성노예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으로 다시 저질러 졌다. 우리는 또 한 번 무기력하게 우리 여자들을 빼앗겼다. 철저한 성적 노리개감으로…

어느 잘생긴 유명 배우가 극중에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못미!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비록 최근에 많이 좋아졌지만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오랫동안 환향녀 아니 환향년 취급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망언에 또한번 멍든 그들에게 우리라도 마음속으로 역사의 피해자로 위로하고 아픔을 같이 해 줘야 한다.

이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자.
지못미!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을 보듬고 따뜻하게 안아 줌으로써 비록 늘그막이나마 화냥년아란 잘못된 경멸의 이름 대신 花樣年華란 인생 최고의 시절을 사과와 위로의 선물로 그들에게 주자.

작자 주)
‘花樣年華’ 이 말은 인생에 있어서 꽃이 핀 것처럼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순간을 말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왕가위 감독이 만든 영화 제목으로 장만옥과 양조위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