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원 칼럼]YS 遺志, 야만시대 끝낼 변곡점이 되길
[서성원 칼럼]YS 遺志, 야만시대 끝낼 변곡점이 되길
  • 국토일보
  • 승인 2015.11.3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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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 국토일보 주필

YS 遺志, 야만시대 끝낼 변곡점이 되길

 
스페인 광장의 세르반데스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1547~1616 세르반데스, 미쳐서 살다가 깨어서 죽었다.”

돈키호테를 통해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세르반데스는 내놓은 작품마다 세상을 풍자하고 고발해 모든 세상 사람들과 함께 깨어서 죽고자 했다. 일생을 깨어서 살다가 깨어서 죽는다는 것, 그리 쉽지 않다는 묵시적 경고이기도 하다.

대개의 경우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생(生)을 마감하는 게 상례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돈에 미쳐서, 권력에 미쳐서, 명예에 미쳐서 그리고 때론 사람에 미쳐서 외길 인생을 살다가 그대로 삶을 끝낸다.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를 내세워 깨어서 죽고자 했던 것은 이 당시의 야만적인 시대 상황을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었던 탓이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군주의 횡포, 종교전쟁 시기의 증오와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분열이 난무하는 야만의 현장에서 끝까지 미쳐서 살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가 깨어서 죽고자 했던 절규는 그래서 비록 국적을 달리했지만, 프랑스의 톨레랑스(관용) 운동으로 맥이 이어지며 빛을 발(發)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엊그제 우리는 나라의 큰 어른을 떠나 보내면서 ‘통합과 화합’으로 다시 ‘깨어나라’는 세르반데스적(的) 충절의 당부를 들었다. 시대와 권력의 격랑 속에서 도전과 투쟁의 삶을 산 김영삼(YS) 대통령이었지만 떠나는 마지막 길에 우리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관용’의 미덕인 ‘화합과 통합’으로 새롭게 깨어나라는 호소였다.

고인이 마지막 필담으로 남긴 이 유지(遺志)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기만 하는 분열과 대립, 이로인한 갈등과 증오를 더 이상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안타까움의 토로나 다름없다. 미쳐서 갈라지기만 하는 야만적 시대 상황을 유훈으로나마 바로잡아 보려는 충정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미쳐서 살다가 미쳐서 죽을 일들과 분위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의미다. 끌어안기보다는 갈라지고 해체되는 모습과 행태가 만연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중심엔 항상 정치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대세력이 무조건 정부에 돌을 던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도 정치세력들의 악습적 흑백논리에 기인한다. 그들은 늘 자신을 선(善)으로, 상대를 악(惡)으로 간주하기 일쑤다. 노동계 등의 대규모 집회 때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룰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태가 난무하는 것 또한 이 때문이며 정치권의 원심력과도 무관치 않다.

질곡을 헤매는 경제 문제도 정치권의 시각에 잡히면 이분법적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기 일쑤다. 이건 정도의 정치가 아니다. 정치는 타협과 절충의 연속이다. 상대를 악마로 본다면 함께 정치를 할 수가 없다. 끝장을 봐야 하는 섬멸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결코 보수와 진보의 차원도 아니다.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다. 직설적으로는 ‘상식의 실패’나 다름없다.

솔직히 요즘처럼 흑백논리가 판칠 때도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이분법은 무섭기만 하다. 말 한마디로 상대편을 난도질 하기 십상이다. 걸리면 생매장할 기세까지 보인다. 이처럼 흑백논리가 압도하면 싸움을 말릴 중간지대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차라리 양극단의 한쪽에 서야 편하다는 분위기까지 번지고 있을 정도다. 중립적이면 ‘어느 쪽에 붙을지 모를’ 박쥐처럼 취급한다. 심지어 양쪽에서 모두 ‘회색분자’라고 빈정대기까지 한다.

하지만 회색분자야말로 다원화 사회의 주역이라 부를 만하다. 두터운 회색지대는 성숙한 사회로 가는 균형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정치적 무관심과 부동층(浮動層)을 혼동하고 있다. 부동층이야말로 눈여겨 봐야 할 대상인데 말이다. 그들을 이제는 부동층 대신 ‘중용(中庸)층’으로 불렀으면 싶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도 양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혼탁한 시대 상황에서 한 순간 우리를 일깨운 YS는 평생을 국민과 함께한 지도자이자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다. 그리고 그가 한국 정치에 남긴 그림자는 크고도 길다. 그런 분을 떠나 보내면서도 고인의 절절한 호소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진정 미쳐서 죽을 일만 쌓여갈 뿐일 게다.

‘통합과 화합’의 문제는 결코 좌 우, 보수와 진보, 여 야간의 손익적 문제가 아니다. 국가 운명의 문제며 눈앞의 엄정한 현실이다. 우리 모두가 고뇌하면서 야만의 시대를 끝낼 변곡점으로 포용해야 할 ‘당위(當爲)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부터 가시화를 위한 솔직하고 담대한 구상과 정직한 토론이 선행돼야 한다

“서 국장, 경제 문제는 쉽고 간단하게 질문해 주시오!” 필자가 경제신문사 편집국장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들은 진솔하고 겸손한 첫마디다. 그렇다, 겸손함은 몸에 밴 솔직함의 표출이기도 하다.

‘화합과 통합’도 낮아지고 포용하려는 겸손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솔직하고 겸손함으로 새롭게 깨어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