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문화탐방] 해녀 이야기 1
[해양문화탐방] 해녀 이야기 1
  • 부산=김성민 기자
  • 승인 2023.11.0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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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선 '잠녀로,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鮑作人)... 한때 나체(裸體) 조업
▲탐라순력도 병담범주(屛潭泛舟).( 해양문화산업의 이해 제공)
▲탐라순력도 병담범주(屛潭泛舟).(해양문화산업의 이해 제공)

[국토일보 김성민 기자] 해녀(海女)는 제주도, 부산, 남해연안 또는 동해연안, 드물게는 일본, 동남아시아, 러시아 등에서 잠수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들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해녀 하면 제주도를 많이 떠올리지만, 남해연안의 섬이나 수심이 깊은 동해연안의 어촌에도 제주도 못지않게 해녀가 많다. 현대에도 남자 잠수부가 없지는 않다. 잠수복을 입고 수면 위에서 기체를 공급받으며 바다를 누비는 남자 잠수부는 머구리라고 부른다.

제주도에선 '잠녀'나 제주도 방언인 '좀녀(ᄌᆞᆷ녀) 또는 좀녜(ᄌᆞᆷ녜) '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둘 다 쓴다. 잠(潛)자의 제주식 발음이 아래아가 들어가 "ᄌᆞᆷ"이다. '해녀'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해 1980년대 이후 다수를 차지하게 됐지만 제주 어촌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채취작업 하러 나가는 것은 물질하러 간다고 표현한다.

조선 시대에는 해녀와 비슷한 일을 하는 남자 잠수부는 포작인(鮑作人), 포작간(鮑作干), 포작한(鮑作漢), 복작간(鰒作干) 등으로 불렀다. 포작(鮑作)이라는 업에 종사하며 진상(進上)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원래는 '보자기'(혹은 보재기)라고 부르는 것을 한자음을 빌려 포작이라고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포작인은 어부면서 동시에 잠수사 역할을 했으므로 신분은 양인이나 하는 일은 천했다.

포작인은 깊은 수심에서 전복과 소라, 고둥 등을 전문적으로 채집하고, 해녀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해조류를 중심으로 채집해 역할이 비교적 구분돼 있었다. 어부 겸 잠수부 겸 수군과 격군(노꾼)의 역할을 겸하는 포작인은 일이 힘들고, 공물로 바쳐야 할 전복 등의 할당량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다 보니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도주해 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진상해야 할 공물은 많은데 남은 인원으로는 할당량이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조선정부는 포작의 역을 아예 숫자가 많은 해녀에게 전부 떠넘겨 버렸다.

결과적으로 포작인이라는 직업은 아예 없어져 잠수부는 해녀만 남게 됐다. 지금이야 잠수복을 입고 오리발을 신고 물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저고리 하나 걸치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는데,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군(耽羅郡)의 구당사(勾當使)로 부임한 윤응균이 "해녀들의 나체(裸體) 조업을 금한다"는 금지령을 내린 기록이 있고, 일본에서는 개화 이후인 비교적 최근까지 나체로 물질을 하는 곳도 있었다.  

조선시대인 1628년(인조 6년) 제주도로 유배된 이건(李健)이 쓴 한문수필 〈제주풍토기〉에도 해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건은 글에서 "잠녀(潛女)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낫을 들고 바다 밑으로 들어가 미역을 따고 나온다"고 설명했다. 또한 "남녀가 뒤섞여 일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놀랍다"고 기록했다. 당시까지는 남녀 구분 없이 물질을 했으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여성들만 일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1702년(숙종 28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에게 그리게 한 채색화 〈탐라순력도〉에도 해녀가 등장한다. 〈탐라순력도〉중 취병담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병담범주(屛潭泛舟) 편에는 지금의 제주시 용두암 근처에서 작업복을 입고 잠수하는 해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