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사무소의 업무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현실을 본지를 통해 알린 적이 있다. 그것은 과거에 비해 대가는 줄어들고 업무량은 점점 늘어나는 데 계약기간이 한없이 연장되는 현상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우리나라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 대한 고객의 폭언이나 모욕 등 갑질에 대해 적극 대응하고 있는 추세다. 전화상담원과 통화할 경우에도 경고성 안내가 먼저 나올 정도이니 많이 개선돼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건설업 자체를 3D업종으로 여기는 요즈음의 분위기에 젊은 인재를 영입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 건축사사무소 등에서 종사하는 분들의 고충을 들어보면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
설계나 CM과 같은 업무는 본질적으로 서비스업에 속한다. 고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캐드 같은 컴퓨터 중심의 업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육체적 노동자와 다를바 없었지만 지금과 같은 정신적 고통은 덜 했을지 모른다. 그 이유는 과거에는 그나마 설계자로서의 권위가 존재했고, 업무에 대한 대가도 충분히 인정받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디자인이나 설계와 같은 업무가 ‘용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서비스업이라고 하지만 창의적인 지적업무를 ‘노무’ 또는 ‘용역’이라 하는 것은 맞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리 부른다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어느새 우리나라에서는 설계를 업으로 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감정노동자가 된 것 같다.
발주처가 갑이고 설계자가 을이다 보니 발주처의 의견이 우선시 되고, 발주처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구조에서 을은 항상 갑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들이 임의로 정해놓은 시간에 맞춰야 하다보니 철야작업도 해야 한다. 을은 누구에게도 고통을 호소할 수가 없다. 혹시라도 갑의 귀에 들어가면 불이익을 받든지 아니면 그다음 일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설계나 CM업계는 최근 품질과 안전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감점제도 앞에서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다. 감점을 받을 경우 자기 잘못을 바로잡기도 전에 영원히 업계에서 퇴출당할 수도 있다. 세상일을 잘 되게 하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 모두가 필요하다. 어느 한쪽만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 건설산업 구조를 보면 당근보다는 채찍으로 다스리는 경향이 많아 우려스럽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는 설계자든 현장기술자든 일에 대한 의욕보다는 수동적인 모습이 먼저보일 수 밖에 없다.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의 회사에서 추진 중인 건축기본계획 업무가 최근 부지문제로 인해 계약기간이 한참 늘어날 수 밖에 없게 됐다. 비록 예상보다 많이 지체되고 힘든 업무였기는 하나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며칠 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그 발주처가 춘천 소재의 강원도 소속의 모 연구원이었는데, 원장께서 직접 회사를 방문해 그간 노고에 대해 인사하겠다는 연락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수고하는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일이 잘 끝났을 때 보고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에서 기관장을 포함한 여러 무리 속에 끼어 식사를 한 적은 있어도 이번처럼 일이 지연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기관장이 멀리서 직원들을 대동한 채 찾아오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비록 특별한 일이 아닐지 몰라도 30년 이상을 같은 업계에서 을의 입장에서만 일을 해온 필자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특별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공공기관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의 기관장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권위의식 때문이 아니라, 또한 을의 지위를 하찮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업무에 대한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관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애착이 있다면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따라서 이번처럼 일이 지연돼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