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87>광화문과 cuddle death!
[안동유의 세상만사]<87>광화문과 cuddle death!
  • 국토일보
  • 승인 2016.12.0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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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유 팀장 / 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기획전략팀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씨(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기획전략팀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팀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팀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광화문과 cuddle death!

배우 율부리너의 영화 중 대표작이 태국의 전신인 시암 왕국을 무대로 한 ‘왕과 나’이다.

이른바 빡빡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과시하며 강인함과 독선에 찬 왕의 연기에 몰입한 그의 연기는 압권으로 평가받는다. 절대권력을 과시하며 여러 명의 부인과 많은 자녀를 둔 왕의 모습을 잘 그린 듯하다.

왕이란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다.

생각해 보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동양의 생각처럼 인간이 기원하면서부터 왕이란 제도가 생겼을 리가 없다. 살아보진 않았지만 논리적 추론이 가능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짐승에서 겨우 벗어나 인지가 발달하기 시작했을테고 자유로이 떠돌아다니며 사냥이나 채집을 하며 먹고 사는 데 급급해서 사회조직을 만들거나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홉스나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막기 위해 또는 사회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민들이 권력을 한 사회의 대표자나 왕에게 이양했다.

홉스나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막기 위해 또는 사회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인민들이 권력을 한 사회의 대표자나 왕에게 이양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을 훨씬 넘어서는 권력을 넘겨줘서 사회 전체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힘을 줬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것이 개미와 벌의 사회다. 흔히 개미나 벌의 사회를 여왕과 그 백성인 일개미, 일벌의 구성으로 이해한다.

과연 그럴까? 진화생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개미나 벌은 가장 효율적인 삶을 위해 기능을 양도한 듯하다.

일개미와 일벌은 중성이다. 인간이 마음대로 왕이라고 이름을 붙인 여왕개미나 여왕벌은 떠받듦을 받는 듯 하지만 가장 하층 계급인 듯하다.

출산 기능을 모두 한 개체에 떠넘기고 중성으로 삶과 일을 즐기는 듯 하다는 것이 개미와 벌의 사회를 분석한 소회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종족번식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여왕개미와 여왕벌은 차라리 씨받이에 가깝다.

번식기가 되면 또 하나의 불쌍한 존재인 숫개미나 수펄들과 나란히 하늘 높이 군무를 추다가 오로지 번식의 소임을 다하여 결혼비행을 마친다.

왕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결코 그 사회를 통치하진 않는 것이다. 모두가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해 이름 붙인 것이다.

하긴 사람의 사회도 각자의 인민들이 편히 살기 위해 귀찮은 정치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한 것이 왕이나 대통령이란 제도인지도 모른다.

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거창하게 로크나 루소의 저항권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내가 맡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데 대한 회수는 가능하다.

인민주권이든, 국민주권이든. 전부위임이든, 일부위임이든.

곤충도 하는 일을 만물의 영장이 못할까? 출산을 못하거나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여왕개미는 먹이가 되고 여왕벌은 죽여 버림 당한다.

특히 여왕벌은 많은 일벌들이 들러붙어 뜨거운 열로 죽여 버린다. 이른바 cuddle death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회를 위해 필요하지 않으면 군식구가 돼 가차없이 버림받는 것이다.

사회의 보전을 위해 필요하지 않은 어떤 존재도 용납하지 않는다. 사람의 사회에서도 역시 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역성혁명이나 반란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에 많은 예가 있다. 걸왕, 주왕 등 중국의 많은 폭군과 우리의 연산군이 그렇다.

이래저래 왕이나 대통령은 위험한 자리다.

평범한 백성이 더 행복하단 생각과 함께 cuddle death 전에 원만하고 합리적으로 정리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