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컬럼] 이병석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장
[의정컬럼] 이병석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위원장
  • 국토일보
  • 승인 2009.07.1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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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멘, 대인(大人), 대통령 그리고 '그레이트 딜' (Great Deal)

기부, 자원봉사 활성화 제도적 기반 시급하다

 ‘마음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주변에서 수렵(狩獵)생활을 하는 부시멘족(族)도 살찐 고기를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젊은이가 크고 살찐 소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소가 ‘형편없는 놈’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만일 그가 우쭐거리고 다른 사람을 깔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크고 많은 사냥을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들은 영원히 사냥터를 잃게 될 것이다. ‘겸손’이 경제를 지탱하는 지혜였던 것. 

솔로몬 군도의 카오카족(族)은 농경과 목축 생활을 한다. 누군가가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한다면, 그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친구들을 동원해 넓은 경작지를 경작하고 돼지 떼를 늘여야 한다. 남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노력해 부자가 되었을 때, 그는 드디어 축제를 연다.

축제의 주최자에게는 ‘뼈와 상한 케이크’만 남고 ‘고기와 기름’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대인(大人. Big Man)이라는 명예가 그에게 남는다.

그가 나누어 주는 축제의 몫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명예와 존경이 커진다. 누군가는 다시 ‘존경’을 얻기 위해 다시 축제를 준비할 것이다. ‘명예의 경쟁’은 마치 노동자나 기업가처럼 사회의 생산력을 높이는 지혜였던 것. 

캐나다 벤쿠버 섬에서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던 콰키우틀족(族)은 ‘포트래취potlatch’라는 이름의 잔치를 벌였다. 고기떼는 늘 강어귀에 몰렸고, 어로기술만 있다면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지위에 불안을 느낀 추장은 도전을 제거하기 위해 큰 포트래취를 열었다.

초대된 이웃 부족을 기죽이기 위해 산더미처럼 선물을 쌓아 놓고, 심지어 남은 재산을 불태우기까지 한다. 선물을 받은 이웃 부족이 복수하는 방법은 더 큰 답례 포트래취를 여는 것뿐이다.

콰키우틀족의 추장은 어려운 일을 전쟁 노예나 부하들에게 시켰다. ‘고기와 기름’은 자신이 가지고 ‘뼈와 상한 케이크’를 부하에게 준다는 점에서 ‘대인’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들이 여는 경쟁적인 축제는 해안이나 늪지대, 고산지대 등 서로 다른 경제 환경에 있는 부락들 사이의 생산력 차이를 바로잡는 자동평형장치와 같은 것이었다. 굶주리는 부락은 단지 이웃부락의 추장이 위대하다고 인정만 하면 되는 것. 

'뉴딜New Deal’은 국가가 ‘대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초기 단계에서도 가장 많은 부를 소유하면서도 가장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존경했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이 안전하게 되자 상류계급은 마치 콰키우틀족이 재산을 불태우는 것처럼 무절제한 소비와 흥청거리는 소비와 낭비로 사람들의 기를 꺾었다.

이웃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뉴딜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수입을 올려 혜택 받지 못한 1/3이 소비자가 되어 경제에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쌓아 둔 부자들의 돈을 거두어 중산층과 노동계급,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판매와 경제성장을 부추긴다는 계획이었다. 

다시 우리는 디지털 기술 혁명이 야기한 새로운 경제 환경에 맞닥뜨렸다. 기술혁명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고 더 많은 여가를 주는 해방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에서 기술혁명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있을 뿐이다. 기술 혁명에 적응한 소수에게는 넘치는 부(富)를 안겨주지만, 기술 혁명에 적응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시장은 세계화되었으며, 국가는 더 이상 대인의 역할을 수행하기 힘들게 되었다. 기술혁명은 과거 농업에서 산업으로 넘어가는 과정과는 차원이 다른 전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이 나치를 뽑았던 1933년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범죄나 마약과 같은 하위경제 - 지하경제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너무 많이 가진 소수와 너무 없는 다수가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지금은 ‘정치적 다이너마이트’다.

누군가가 그 뇌관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이너마이트의 뇌관을 제거하기 위해선 콰키우틀족의 추장이 한 것처럼 ‘시장에서 이탈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노동할 의사를 가진 사람이 노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카오카 족의 대인처럼 ‘전환의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는 여전히 국가다.

전환의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는 자는 시민사회다. 굶주림을 면하고 기본적인 교육을 받으며 일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이고, 국가의 의무다. 하지만 굶주림을 면한다고 해서 기술혁명의 새로운 경제체제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격차’ ‘기술 수혜의 격차’ ‘세계화의 격차’는 ‘가난을 대물림’하는 새로운 요소다. 

‘기부’와 ‘자원봉사’는 뇌관을 제거하는 거의 유일한 열쇠다. ‘기부’는 자선이 아니라 부시멘 족의 지혜처럼 공동체의 사냥터를 영원히 지키는 일이다. 자원봉사는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해진 사회에서 非시장 경제의 경제를 만들어가는 초석이다. 이 시대 대인(大人)들이 벌이는 축제다. 이것은 뉴딜을 넘어서는 디지털 시대의 ‘그레이트 딜 Great Deal’이다.

16대 국회가 시작되던 2000년부터 ‘기부금품모집 규제법’을 ‘기부금품 모집법’으로 바꾸고 ‘자원봉사진흥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와 함께 노력했다. 시장, 즉 기업의 불투명성이 이 법의 제정을 가로막았다.

또한 모든 것을 정부에 의존하려는 시민사회의 관성도 걸림돌의 하나였으며, 서해 기름 유출 사건에서 보듯이 차고 넘치는 국민의 자원봉사 의지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정부의 게으름도 한 몫 했다.

다행스럽게도 기부금품 모집법과 ‘자원봉사활동 기본법’은 17대에 와서 통과되었다. 하지만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자선적 의미의 기부나 자원 봉사를 넘어서서 자신의 선진적 능력 - 문화, 기술, 세계화 -을 공동체에 자원해서 제공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 인센티브의 제공 등 - 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부와 자원봉사의 활성화만이 디지털 기술 혁명이 인간을 분열시키고 대립시키는 세상이 아니라 해방시키는 아름다운 미래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대통령이 약속을 지켰다.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돌린 첫 대통령이 되었다. 아직 뉴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새로운 ‘딜Deal’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 전체에 ‘대인大人’이 차고 넘치기를 기대해 본다. 마음 좋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