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66>스파르타쿠스와 존 핸콕!
[안동유의 세상만사]<66>스파르타쿠스와 존 핸콕!
  • 국토일보
  • 승인 2016.05.2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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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유 팀장 / 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정보지원팀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씨(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정보지원팀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팀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팀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와 존 핸콕!

로마를 배경으로한 몇 개의 영화가 있는데 대개 스펙터클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공통점이다. 벤허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등.

그 중에 인상적인 것이 검투사 글래디에이터와 그런 검투사 노예들의 반란군 이야기를 영화화한 스파르타쿠스다. 쿼바디스와 기독교 전파란 면에서 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 중 좀 오래된 것을 대학시절 본 기억이 있는데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반란 진압 후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의 수괴로 지목돼 색출돼야 했다.

사실 전투 중에 이미 죽었지만 많은 노예들이 언덕에 포로로 잡혀 앉아 있다가 “누가 스파르타쿠스냐?”는 질문에 “나요.”, “나요.” 하고 여기저기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로마군을 혼선에 빠트리고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감독이 노린 건 밑바닥 민중의 분노지 한 사람의 영웅적 투쟁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스파르타쿠스가 죽어도 그 저항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자유를 향해 투쟁하며 선봉에 섰던 스파르타쿠스는 사실 저항에 동참한 노예 한사람 한사람 모두라고 볼 수도 있다.

이런 것과 비슷하게 연상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송강호 분)이 재판받는 과정에서 부산지역 인권 변호사 전부가 변호인으로 나서서 변호인을 호명하고 확인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장면이 나온다.

일일이 변호인을 호명할 때마다 “예!”하고 변호사들이 일어서며 법정을 가득 채울 때 관객의 가슴은 감동으로 가득차는 것이다. 아다시피 변호인은 노무현 전대통령의 변호사 시절 일화를 바탕으로 했다. 실화란 얘기다.

로마의 검투사 노예는 진작 없어졌고 이제 사회는 변해 그토록 열망하던 민주화가 이뤄졌다.

민주주의를 얘기하면 빠질 수 없는 게 미국의 독립이다. 보통 독립은 민주혁명이라기 보단 민족적 자각의 모습을 띠는데 미국 독립만큼은 민주(시민)혁명으로 불린다. 시민 계급의 자각으로 왕정에 대한 저항과 인권의 확립을 위해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 혁명 때 영국의 왕당파가 독립파를 탄압하며 독립 운동에 가담하면 교수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이에 그 유명한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인 John Hancok이 교수형에 처하려면 나를 제일 먼저 처하라라고 하며 독립선언서에 아주 크고 멋지게 첫번째로 서명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선 서명을 다른 말로 John Hancok이라고도 한다.

“Put down your John Hancok.”하면 서명하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 시민의 가슴에 인권과 자유에 대한 열망이 불같이 일었고 독립전쟁까지 거친 후 독립을 쟁취했고 지금은 본국이었던 영국을 제치고 세계 제일의 강대국이 돼있다.

아마 그의 가슴엔 두려움도 있었지만 모두 저항하면 아무도 죽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나만 살고자 두려움에 발을 빼면 네덜란드 손가락 소년의 일화에 나온 둑처럼 나중엔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처럼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두려움 자체뿐이다.

독재자의 권위주의는 두려움에 기초한다. 개별적인 두려움을 이용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다.

지나간 개그콘서트 코너에 왕해라는 코너가 있었다. ‘광해’란 영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왕이 무슨 말을 해도 이른바 개무시를 하는 대신과 심지어 내시 때문에 왕은 아무런 힘도 없다. 관객은 재밌게 폭소를 터뜨리지만 웃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본에 먹힌 것은 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외세에 손발을 맞춰 줬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외세의 침략도 있을 수 있고 부당한 외압도 있을 수 있다. 이권 개입 등 압박을 통해 뭔가 불순한 의도를 달성하려고 한다.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이럴때 일수록 구성원이 단결해 외압을 물리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하나 모두가 차례로 희생된다.

로마군의 거북대형은 각자의 방패로 자신과 동료를 보호해 전체가 하나의 갑옷처럼 화살을 막아내는 대형이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인 안 되는 것이다.

모두가 내가 스파르타쿠스라고 외치며 나서거나 나부터 처형하라고 존 핸콕처럼 선언서에 서명을 하면 독재자는 코메디처럼 우습게 힘을 못 쓰게 된다.

이완용 같이 둑을 무너뜨리는 내부의 좀벌레를 먼저 잡아야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