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54>루시퍼의 타락
[안동유의 세상만사]<54>루시퍼의 타락
  • 국토일보
  • 승인 2016.01.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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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유 팀장 / 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정보지원팀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씨(기계설비건설공제조합 정보지원팀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팀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팀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루시퍼의 타락

얼마전 군부대 특수 훈련 중 포로 체험을 하다가 사망사고가 일어난 일이 있다. 그 재판이 진행돼 1심 판결이 났고 형량의 과다 유무와 훈련 진행의 감독 과실 정도가 문제가 되어 2심 항소 여부와 형량의 적정성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업무상 과실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포로 역할을 맡은 사람과 적군으로서 포로를 심문하는 사람의 입장이 확연히 갈라짐으로써 훈련이란 이름을 빙자한 무의식적인 잔혹행위가 발생한 듯하다.

이를 엄격히 규명하고 책임 여부를 명확히 따지는 것은 군검찰과 재판부가 할 일이지만 이런 일이 단지 군 같은 특수 사회와 특수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의미있는 심리학 실험이 감옥 실험이다.

사회심리학자 필립 짐바로드는 스탠포드 대학에 감옥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누어 실험을 진행했다. 모두 지원자였고 역할은 제비뽑기로 나누었다.

실험결과는 놀라웠다. 간수는 아무런 지시없이도 극한의 가학성을 보였고 죄수는 극도의 비굴함을 보였다. 실험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인권침해의 염려가 있어 결국 실험은 도중에 중단됐다.

누구는 이런 인간의 가학적인 잔인함 때문에 이를 루시퍼 이펙트라고 이름한다. 성경에 나오는 악마 루시퍼를 빗대어 이름 붙인 것이다. 사람이 타락하면 어디까지 타락하는지 볼 수 있는 실험이기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본디 루시퍼는 천사였고 자신이 스스로 높아져 타락하게 되면서 악마가 된 것이다. 잔학하게 타락한 인간성을 참으로 적절하게 비유한 것 같다.

오늘날 성경은 기독교를 믿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인류의 정신적, 문화적 자산이 됐다. 많은 문학작품과 인문학적, 예술적 결과물들이 성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창세기엔 신이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한 것으로 돼 있다. 이를 두고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선악을 잘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데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분별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인간이 어리석게 살기를 바라는가?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이 얘기하기를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나 아무리 좋은 일도 신이 금지하면 하지 말아야 하고 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므로 그런 순종 여부를 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창세기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하는 뱀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이 중요하다. 성경은 사람이 신을 밀어내고 신의 자리에 올라 앉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선악을 아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니 당연히 금지한 것이다.

신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선악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면서 인간은 타락하게 되고 자기 마음의 낙원인 에덴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분쟁과 잔혹함이 신을 밀어내고 신의 자리에 오른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게 됐다. 그래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된 것이고 온갖 수고를 하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성경을 강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인간의 원초적 타락을 사회심리학적으로 고찰해 보자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두렵다. 현대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영악해지고 그만큼 정신은 황폐해진 것 같다.

얼마전 군대 내서 벌어진 윤일병 학대 사건이 그런 것이고 심심찮게 터지는 염전 노예 사건과 목사들이나 종교인들이 운영하는 복지 시설에서 인권 문제가 터지는 것도 그런 것이다.

최근 몽고간장 회장의 운전기사 학대 사건도 인간으로선 차마 못할 짓을 한 것이다. 내가 돈을 주고 부리는 사람은 종이나 노예, 나아가서 마치 개, 돼지처럼 내 마음대로 생사여탈권을 쥔 듯이 사람이 교만해진다.

완장을 차고 칼자루를 쥐게 되면 인간은 갑자기 자신이 높아진다. 마치 그들을 죄지우지하면서 내가 신이 된 듯한 느낌. 그것이 우상이다.

자신을 신으로 만들고 자신 마음대로 선악을 판단해서 남을 징치한다면 일견 그럴싸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고가는 것이다.

독재자가 국민을 억압하는 것부터 작은 단체에서 마구 칼을 휘두르는 것까지 인간이 조직을 거대화하면서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또는 장악하고 나서 교만해진 탓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타락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성을 회복할 가능성과 희망도 있는 것이다. 감옥 실험에서 소수이지만 정의감을 갖고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항변하고 정의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다는 건 고무적이다.

파스칼이 인간을 천사와 악마의 중간자라고 설파했듯이 악마에게 가까이 갈지 천사에게 가까이 갈지는 우리가 판단하면 된다.

부디 새해엔 이런 인간의 잔혹성과 타락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