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이판사판 공사판’입니까?
아직도 ‘이판사판 공사판’입니까?
  • 국토일보
  • 승인 2009.04.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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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기 칼럼] 동아대학교 교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도저도 아닌 상태’ 또는 ‘막다른 궁지’, ‘끝장’ 등의 비유로 뾰족한 묘안이 없거나 절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을 때 ‘이판사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본래 ‘이판사판’은 한자어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붙어서 된 말로 조선시대에 나온 불교 용어이다.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는 극에 달했다. 조선의 건국에 많은 신흥 유학자 세력이 참여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 기초하여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숭유억불을 표방하게 되었고 불교는 탄압의 대상이 됐다.


졸지에 천민계급으로 전락한 승려들은 위기에 처한 불교를 구하기 위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하나는 불법의 맥을 있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사찰을 존속시키는 것이었다.


은둔하여 참선 등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는 승려들을 이판승(理判僧)이라 하였고,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 종이, 신발 등을 만드는 제반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원을 유지하였던 승려들을 사판승(事判僧)라 하였다.


이판과 사판은 서로 분리 고착화 되면서 각기 장단점을 지니게 됐다. 이판승은 조선시대 불교의 사상적 명맥을 유지하게끔 한 반면, 사원의 운명을 외면하고 숨어살아 중생구도라는 본연의 자세를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사판승은 숱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불교의 교단을 지킬 수 있었으나, 불교의 가르침을 깨우치지 못하는 무식한 승려가 돼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것을 가리켜 오늘날 ‘이도저도 아닌 상태’를 ‘이판사판’이라고 한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마지막 신분계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기도 하여 ‘막다른 궁지’, ‘끝장’을 나타낼 때 ‘이판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일 이판승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지혜광명이 이어질 수 없었고, 사판승이 없었다면 사찰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이판이든 사판이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측면이나 ‘수행의 길은 하나다.’라는 불교의 근원에서 보면 ‘이판사판’은 매우 긍정적인 면이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전이되어 매우 냉소적이고 비하적인 뜻으로 쓰이게 된 데에는 불교를 폄하하려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판사판이 공사판과 함께 쓰여 ‘이판사판 공사판’이라고 하면 그 부정적인 의미는 훨씬 더 강해진다.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공사현장을 비유한 의미라고 판단되지만 그 이면에는 건설업에 대한 일반인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얼마나 강한지를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불교를 음해하고 평가절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시대 용어가 오늘날 건설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말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공사장 붕괴사고나 최근 발생한 경부고속전철 불량 침목 사용과 같은 건설업을 둘러싼 뿌리 깊은 부실공사의 문제는 여전하다.

 

대형공사의 입?낙찰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로비.비리사건으로 얼룩진 부정부패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건설업체간의 불공정 거래와 계약 관행은 지속되고 있고, 대형건설업체 간 입찰담합에 의한 수주독식의 구조적 문제는 여전하다.

 

국민들의 눈에는 ‘건설업은 부실과 부패, 비리의 온상’이라는 등식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국내 건설산업은 수주액이 100조원을 상회하는 등 외형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뒷받침의 미흡과 기술경쟁력의 취약과 같은 건설공급체계의 문제 때문에 후진적인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최근 대통령 산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건설산업 선진화방안’의 로드맵을 확정 발표했다.

 

건설규제 완화를 통한 건설산업 생산성 제고, 발주제도 개선에 의한 공공사업 효율성 향상, 설계.엔지니어링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 공정거래 질서 확립 및 투명성 제고 등이 핵심내용이다.


건설산업의 효율성 제고와 선진화를 위한 각종 대책 수립과 정책적 의지 표명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적인 행사처럼 해온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후반의 ‘공공사업 효율화 종합대책’과 참여정부의 ‘건설기술.건축문화 선진화 로드맵’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산업이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가 여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젠 고민할 필요가 있다. 혁신적인 계획과 로드맵을 만든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적이고 일관성이 있는 추진력이 중요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권 초기에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의 산물이거나 업역간의 이해관계와 갈등 때문에 계획이 무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아울러 건설업에 대한 ‘이판사판 공사판’의 부정적 이미지를 걷어 낼 수 있는 마지막 정책 대안 이길 기대해 본다. 

 hglee@da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