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카자흐스탄인
고마운 카자흐스탄인
  • 국토일보
  • 승인 2009.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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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환의 세상만사] (주)삼미 대표이사 / 공학박사 / APEC 공인컨설턴트 / 기계기술사

얼마 전 카자흐스탄에서 일정을 마치고 시베리아항공 여객기로 유라시아지역의 동토 카자흐스탄 상공을 날아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이었다. 


카자흐스탄 대사관에서 준 ‘카자흐스탄은 어떤 나라’라는 소책자에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많은 정보가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니 슬픈 마음에 눈 쌓인 끝없는 평원을 내려다보며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린적이 있다.


1937년 8월 소련정부는 한인에 의한 일본 간첩행위 근절을 명분으로 연해주 거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고 그해 9월 최초로 한인 이주민을 실은 열차가 카자흐스탄에 도착했다.


마침 겨울이 시작되던 때라 추위와 굶주림을 해결해야 하는데 허허벌판에는 목재는커녕 땔감조차도 귀한 형편이었다. 당장 추위를 피하기 위해 농기구를 이용하여 토굴을 파는 방법 밖에 없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토굴속에서 살아나오지 못했고 추위와 홍역 등 질병으로 어린이의 60%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 해 카자흐스탄에도 기근이 들어 카작인 20만명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연해주에서 온 한인들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살아남은 고려인들은 지금도 카작인들의 그 당시 환대와 친절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이주해온 고려인(오늘날 한인들이 불러주기를 원함)의 후손들은 52%가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을 소지하고 정계, 학계, 의학계 등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건설업계의 2-3위, 전자제품 유통업계의 1-3위를 차지하는 등 근면성실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한 맺힌 이주 열차를 탓 던 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나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 분들이 조국을 잊지 않았던 현장을 볼 수 있어 비행기에서 더욱 서러웠는지 모른다.


업무 중에 만난 카자흐스탄의 조달청 차장이 고려인 3세라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우리말은 잘 못하고 한국에 가보지는 못했어도 조상이 경주 김씨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후손에게 조상의 뿌리를 전해준다고 한다.


그동안 수 많은 사연으로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동포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리고 그 숫자는 얼마나 될까? 돌아가신 분들의 집계는 없으나 2008년 말 재외동포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세계도처에 흩어진 해외동포는 아시아지역 3백30만명, 미주지역 2백40만명 구주지역 65만명등 6백30만명이나 된다. 아마 독립국가연합에 집계된 56만 정도는 러시아의 이주정책에 따른 분산된 동포들로 추정된다.


마침 남인수 선생의 ‘고향은 내사랑’이란 노래는 마치 그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찔레꽃이 피어있네 고향에 묻은 꿈속에 날/ 잘있소 잘가오 눈물로 헤어지던 날 /그대는 대답없고 구슬픈 산울림만 울려주네 / 그때 피었던 찔레꽃이 피어있네/해당화가 피어있네 추억에 젖은 어린시절/꼭오지 꼭오마 손가락 걸어본 시절/그대는 가고없고 외로운 새소리만 들려오네 / 그때 피었던 해당화가 피어있네.


그 동안 종교단체를 주축으로 사할린 동포 영구 귀국 등 매스컴에 발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에 희생돼 지구촌 어느 하늘아래 고국을 그리며 외롭게 숨져가는 동포들이 없어야 한다. 때 늦은 것 같지만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동포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운동을 벌이자. 아울러 조상들이 진 빛을 우리가 갚아야 한다. 카작인 뿐 아니라 6.25때 도와주었던 우방국가에 대해서도 갚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