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 <27>
[안동유의 세상만사] <27>
  • 국토일보
  • 승인 2014.1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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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유 부지점장 / 대한설비건설공제조합 광주지점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씨(설비건설공제조합 광주부지점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부지점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부지점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의 행복을 짓밟을 수 있는가?

중국에 점령당한 티벳을 떠나 히말라야 사원을 찾은 신참 승려 팔덴(쿤장 니마)과 니마(페마 썬덥)는 월드컵 열기에 흥청이는 사원 분위기에 당황한다.

승려가 되고 싶은 두 소년. 그런데 이 사원이 좀 이상하다. 엄숙함과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월드컵이 열리면서 축구 열풍이 사원 곳곳을 달궈놓은 것. 축구 슬로건이 걸려 있고, 수도승들이 입으로는 불경을 읽으면서 눈은 스포츠 잡지의 화보를 쫓고 있고, 벽에는 온통 ‘파라과이 만세!’, ‘독일 이겨라!’ 등의 낙서가 가득하다.

실향의 서러움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 아파할 겨를도 없이 새로 온 신참내기 두 소년은 점점 룸메이트 오기엔에게 말려든다.

부처님 벽화 위에 호나우도 사진을 도배할 정도의 열혈 축구팬 오기엔(재망 로도)은 그의 충실한 친구 로도와 함께 팔덴을 꼬셔 한밤중에 마을에 가서 월드컵 준결승전을 보는 모험을 감행한다.

결국 이 일로 호랑이 스님 게코(오르기엔 토브기알)에게 걸려 식사 당번을 맡게 되지만, 오기엔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프랑스와 브라질의 결승전을 보기 위해 TV를 빌려오기를 게코에게 부탁한다.

호랑이 스님 게코는 늘 고향을 그리며 짐을 쌌다 풀렀다 하는 큰 스님에게 부탁하고 결국 청은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TV와 안테나 대여료를 승려들에게 갹출하고 마지막엔 니마에게 가장 소중한 어머니의 유품인 시계까지 거의 반 강제로 빌려오기에 이른다.

니마는 삼촌인 팔덴의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준 터라 내내 마음이 좋지 않고, 결승전을 보는 오기엔조차 마음이 불편하다.

오기엔은 한창 결승전이 무르익을 무렵 슬그머니 일어서 자신의 귀중품을 뒤적거리고 이를 본 게코는 그를 대신해 니마의 물건을 되찾아주고 오기엔이 누구보다 불성에 가까운 심성을 가졌음을 이해하게 된다.

 

컵이란 영화의 줄거리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리주의자 벤담이 한 말이다.

과연 맞는 말인지…? 모두가 만족하면 과연 선인지, 다수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의 인권이 희생되어도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월드컵을 보며 모두 행복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니마의 소중한 물건을 희생한 대가이다.

흔히 우리는 ‘너 하나 참으면 다 조용하고 좋다’라고 이야기 한다. 전체주의의 시작이다.

무한한 폭력이다. 히틀러도 박정희도 이렇게 독재를 시작했다. 프랑스 지성의 부끄러움인 드레퓌스 사건도 이렇게 진행됐다.

그러나 위대한 지성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란 글 한 편으로 프랑스 지성은 자존심을 회복했다. 프랑스는 한 사람의 인권도 소중함을 생각하는 현대국가로 재탄생하게 됐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위안부도 제발 입닫고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게 위정자들의 속마음이다. 아님 우리 모두의 비열함일지도….

영미에서 법경제학이란 학문이 각광을 받았던 적이 있다. 사회 전체의 이익이 더 큰 쪽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은 정의의 학문이다. 그럴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다. 한 사람이 죽어 그 장기로 여러 사람이 살 수 있으면 그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한 사람의 땅을 뺏아 모두에게 나눠 주면 다들 만족하고 행복하겠지만 그게 바람직한가?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모두의 평화를 얻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일전에 춘천에 머무를 때 경찰서 정문에 간판을 붙여 크게 써놓았다. 한 사람도 억울한 사람 없는 춘천. 정말 감동적인 느낌이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작은 가능성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선진화 되어 가고 있구나!

칸트는 절대적인 정의의 실현을 주장했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공리주의자인 밀도 말했다. 전 인류가 한 사람의 입을 막을 권리가 없다고….

밀을 아버지 친구인 벤담에 비해 질적 공리주의자라고 한다. 나만 배부르면 되나? 나만 만족하면 되나?

생각하며 살자. 배부른 돼지는 되기 싫은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