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 한잔의 여유] 세한도(歲寒圖)
[茶 한잔의 여유] 세한도(歲寒圖)
  • 국토일보
  • 승인 2014.02.1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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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연 태 혜원까치종합건축 대표이사 / 한국건설감리협회 회장

세한도(歲寒圖)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 1844년)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가 집권 안동김씨 세력에 밀려 긴 세월 동안 제주도에 유배돼 언제 사약을 받을 지도 모르며 평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조차 몰락한 그를 외면하는데 비해, 제자였던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 1804~1865)은 김정희와 접촉하다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중국에서 많은 책(수백 권으로 추정됨)을 구해다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답례로 그려 준 그림이다.

‘歲’는 ‘해’를 뜻하여 세밑, 세월, 세시, 몇 세 등으로 쓰이며, 궁극적으론 새해가 시작 되는 설날 무렵을 뜻하는데, 국어사전엔 ‘세한’을 설을 전후로 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사전에서 말하는 기후적인 추위만이 아니고 사색당파로 얼룩진 조정의 정권에서 밀린 당파는 귀양 가고 핍박 받게 되는 과정의 인고의 생활을 하는 서러운 선비들을 일컫는 말이다.

세한도는 말 그대로 추사의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다. 누구에게나 잘 나갈 때와 어렵고 곤궁할 때가 있다. 배부를 때 누가 먹을 것을 주면 별로 반갑지 않지만 춥고 배고픈 때 살펴 주면 조그만 온정에도 마음 깊이 감사하게 되는데, 그의 제자 ‘우선’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신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해 주는 것에 감동해 그려 보내준 대표적인 문인화(한국화 중에서도 글씨가 포함된 그림-동양화는 멀리 인도 등의 그림까지 포함 됨)이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과연 추사만이 할 수 있는 놀라운 구성력에 탄성을 금할 수 없다. 집 한 채를 중심으로 두 그루씩의 나무를 좌우대칭으로 두고 주변은 모두 여백으로 처리하여, 쓸쓸한 화면엔 여백을 따라 겨울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뿐이다.

그러나 그 허름한 집 한 채와 네그루 나무 뿐임에도 불구하고 초라함은 어디에도 없다. 집주인 완당을 상징하는 집은 외양은 허름할지언정 속내는 도도하여 그는 이 집에서 스스로 지켜 나아갈 길을 묵묵히 걸으며, 중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천하의 추사체를 완성하게 된다.

▲ 세한도

오른쪽 위 여백에 쓴 세한도라는 제목의 글씨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정성 가득한 형태의 예서체로 화면 위쪽에 바짝 붙여 놓아 아래 화면의 여백은 더욱 휑해 보인다. 그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 우선에게 이것을 줌) ‘완당’이라는 관서(款書)를 쓰고 도인을 찍었다.

단색조의 수묵과 마른 붓질의 필획만으로 이루어졌으며, 소재와 구도도 지극히 간략하게 다뤄졌다. 이와 같이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화면은 바라만 보아도 찬바람을 느끼게 되며 굳이 화제를 ‘세한도’라 표시하지 않았어도 누구나 세한의 추위를 느끼게 될 것이다.

흔히 세한삼우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지칭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소나무가 등장한다.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코드와 정확히 일치한다. 수차례의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나지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소나무이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를 자세히 보면 맨 오른 쪽에 비스듬한 나무 한 그루는 분명히 소나무이지만 그 외에 뻣뻣하게 서 있는 나무는 모양이 달라 해석이 분분하다.

이 그림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나무에 대해 확실히 알아야 하겠는데 잣나무, 측백나무, 곰솔 등 각종 추측이 많다. 우선 이 그림에서 인용한, 논어에 나오는 원문 글씨 중 ‘송백(松栢)’의 松은 소나무가 분명하다. 栢자(字)는 한자사전에선 ‘측백과 편백(扁柏)의 총칭으로, 柏(측백나무백)의 俗字’ 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송백(松柏-소나무와 잣나무)같은 절개’라는 말의 어원이 될 ‘청송벽백’도 중국어 사전에 ‘靑松碧柏 :qīngsōng bì bǎi' 라고만 돼 있고, 영어사전에도 ‘the pine and the nut pine’ 이라는 설명으로 마무리 되며, 아울러 한자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뜻과 의미가 변하여 왔으니 무려 2,500여 년 전 논어에 쓰인 ‘栢’자가 가리키는 나무를 글씨나 단어를 갖고는 더 확인 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한글 식으로로 ‘잣나무 栢’자(字)라고 생각해보아도 추사가 귀양살이를 하던 그곳은 아열대지방이라서 잣나무가 살지 못한다 하여, 추사가 귀양을 살던 그 근처에 자생하고 있는 곰솔(해송)을 모델로 그렸을 거라는 추론도 있는데, 필자의 지인 중 조경학을 전공한 ‘수석감리사’에게 문의했으나 나무를 직접 보고 사실대로 그린 진경그림이 아니고 머릿속 생각을 통해 그린 그림이다 보니 그림을 갖고서는 확실히 답을 할 수 없지만, 기후 등 제주의 지정학적인 상황을 감안해 곰솔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여기 나오는 세 그루의 나무는 조경을 전공한 기술자에게서도, 한자의 뜻을 통해서도 분명하진 않고 그저 상록수인 소나무 류라고 이해하고 넘어 가야 할 거 같다.

오른 쪽에 있는 큰 소나무는 나무의 형상으로 볼 때 그 뿌리는 대지에 굳게 박혀 있고 어떤 강한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이 굳건할 것임을 볼 수 있고, 다른 나무들은 줄기가 곧고 가지들도 하나같이 위쪽으로 팔을 쳐들고 있는데, 김정희는 이 곧은 나무들에서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이 곧고 젊은 나무들이 자신의 초라한 집을 지탱해주는 것으로 자신을 늙은 노송에, 그리고 이상적을 젊고 굳건한 나무에 비교해 변함없는 송백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듯싶다.

추사는 그림 왼편에 공간을 따로 마련해 정성들여 칸(方眼)을 나누고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었는데, 추사가 쓴 어떤 글씨에서도 이렇게 반듯한 글씨는 본 적이 없다. 위쪽에 넓은 여백을 두고 아래쪽으로 치우치게 자리한 발문은, 그림을 중간에 두고 화면 상변의 ‘세한도’ 글씨와 서로 대칭점으로 마주보고 있다. 해서체로 엄정하게 쓰인 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작 단계]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거년이만학대운이서기래)-지난해에 만학(晩學)과 대운(大雲) 두 책을 부쳐오고
今年又以藕畊文編寄來(금년우이우경문편기래)-금년에는 또 우경문집(藕畊文編)이라는 책을 부쳐오니,
此皆非世之常有(차개비세지상유)-이는 세상에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 아니요

[중간 전반 쯤]
太史公云:태사공(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이르기를 ‘중국에서도, 그것도 의리가 존중되던 좋은 시기에서도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했는데, 그대는 어려운 때 임에도, 힘없는 나를 이렇게 찾아 주고 있으니 태사공의 가르침이 틀린 것인가라면서

[중간 후반 쯤]
公子曰(공자왈)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날이 추워져 다른 나무들이 다 시들은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시들지 않음)을 안다
松柏是毌四時而不凋者(송백시관사시이불조자)-송백은 사시를 통해 시들지 않는 것으로
歲寒以前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세한이전일송백야, 세한이후일송백야)-세한 이전에도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송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서로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가까이 지내는 중국인 친구가 몇 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 갖고와 선물해준 ‘논어’ 죽책을 찾아 보았다. 당연히 1편은 ‘학이편’으로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로 시작되고 있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 세한도의 핵심어인 이 말은 공자의 말씀을 모은 책으로 사서삼경 일곱 책 중의 하나인 논어에 나오는데, 20편으로 이루어진 논어의 9번째 편인 자한 편의 후반부에 나오는 그 원문이다. ‘사람이 시련에 처했거나 시련을 겪은 후에야 그 사람의 진실 된 참모습을 볼 수가 있다’라며 이상적에 감사하면서 칭찬하는 문구로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에]
…悲夫(비부)
阮堂老人書(완당노인서)-슬프다, 완당 씀(그는 생전에 1,000 여개의 호를 갖고 있었음)이라며 완당이란 호를 사용하면서 마무리 짓고 있다.

그림의 오른편 아래 구석에는 주문방인(朱文方印)유인(遊印)이 한 과 찍혀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하여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글귀로 2,000년 전 중국 한대(漢代)의 기와에 보이는 명문(銘文)이라 하니, 금석학에 밝았던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사제의 정을 나누는 데에 2천 년 전의 이 글씨 내용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상적은 스승으로 부터 ‘세한도’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으려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 분들께 두루 보이고 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길 수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에서 말한 대로 이듬해 10월 역관으로 북경에 갔다. 그리고 청나라의 문인 16인과 같이한 자리에서 스승이 자신에게 보내준 작품을 내보였다. 그들은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 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동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贊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으로 모아 10m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었는데, 필자가 아는 한 이런 것은 한국에는 없고 제서(題書)와 발문(跋文)은 안평대군이 쓰고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당시 최고의 문인 20여명이 찬문(讚文)을 쓴, 3년 쯤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차 잠시 한국에 나들이했다가 다시 소유주인 일본으로 돌아가 버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유일하다.

이상적이 귀국하는 길로 댓글이 달린 그림을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었다. 1년이 지나 다시 그림을 보는 추사에게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휑한 가슴에 큰 위안으로 다가섰을 것이다.

세한도는 그려진 이후에 천하를 유랑한 행로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다시 스승에게 보인 후에 이상적이 소장을 하다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그의 아들 김준학이 물려받아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되다가,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추사연구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카 린(藤塚隣)의 손에 넘어 가게 됐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일본으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직전에 서화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 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석 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됐다.

앞서 언급한 ‘몽유도원도’가 우리나라의 것이지만 일본의 국보로 일본이 소유권을 갖고 있음을 볼 때, 또한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결국 미군의 폭격을 피하지 못해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볼 때, 세한도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우리 곁으로 오게 된 것이다.

정부수립과정에서 몇몇 정부요인들이 추가로 댓글을 달았고, 댓글을 받기 위해 이상적이 준비해 두었던 여백이 지금도 일 미터 쯤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댓글을 달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가 나타나 여백 많은 세한도의 댓글 란에 몇 줄 달아야 세한의 한이 좀 풀리는 건 아닐지…

이제 설 연휴가 끝나며 날씨는 점차 따뜻해지겠지만 세한의 세월을 살고 있는, 또 살아가야 할 이들, 어쩌다보니 최고의 선이 돼 버린 복지부분에 정부예산 투입이 집중되면서, 건설쪽엔 투자를 할 수 없다보니 총체적으로 건설경기가 나빠지면서 건설기술인들에게도 성큼 세한의 추운계절이 다가오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