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유의 세상만사] <4>
[안동유의 세상만사] <4>
  • 국토일보
  • 승인 2013.11.18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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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유 팀장 / 대한설비건설공제조합 법무보상팀

 
[안동유의 세상만사]

자유기고가이자 시인인 안동유 설비건설공제조합 법무보상팀장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안 팀장은 KBS ‘우리말 겨루기’ 126회 우승, ‘생방송 퀴즈가 좋다’ 우승 등 퀴즈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MBC 100분 토론에서는 시민논객으로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방송 출연을 통해 또다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本報는 건설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안동유 팀장의 ‘안동유의 세상만사’를 통해 작가 특유의 감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한글과 이두

우리글!
지구상에는 수 백 개의 문자가 있지만 우리글만큼 과학적이고 익히기 쉬운 글은 없다. 이는 국수주의로 말하는 자찬이 아니라 전 세계의 언어학자들이 공인하는 바이다.

과학적이고 익히기 쉬울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현대 과학의 총아 컴퓨터에 가장 적합한 글이다. 물론 세종임금께서 알고 만드신 것이나 예측하고 미리 만드신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합리성과 백성을 위한 편리성을 추구하다 보니 당연한 결과로 이런 성질을 갖게 됐다.

그런데 한글 창제 이전에도 우리말이 있었는데 그런 말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됐을까? 물론 한자로 번역해서 그 뜻을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세종 큰 임금의 훈민정음 서문에도 보이듯이 말의 구조가 중국말과 달라 한자로 기록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 면이 많았다. 특히 소리를 기록해야할 때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두(吏讀)이다. 吏讀라는 말을 풀면 관리, 아전들의 글 읽는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두!
흔히 신라시대 원효의 아들 설총이 만들었다고 하나 정확히는 이두를 정리했다고 하는 것이 옳다. ‘이두’라는 이름도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다. 오히려 향찰이란 이름이 더 맞다고 볼 수 있겠다.

한자의 육서에 이미 가차, 음차란 방법으로 그 뜻과 상관없이 소리를 기록하기 위해 한자의 소리[音]를 이용하여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는 이두의 한 표기법이며 글자가 없는 중국 주변의 민족(이른바 중국으로부터 오랑캐라고 불리던)의 말 곧 사람 이름과 땅 이름 벼슬 이름 등을 원래 소리대로 기록하기 위해 널리 쓰이던 방법이다.

중국 주변 민족도 자기의 말을 기록하는 데 한자를 활용한 이런 방법을 많이 쓰기도 했다. 예를 들면 몽골의 정복자 칭기즈칸을 한자어로 成吉思汗이라고 표기한 것이 그렇다.

낱낱의 글자가 가지는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하나하나의 소리를 통해 당시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비교적 원음에 가까이 기록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훈독이라는 것으로 한자가 가지는 뜻을 소리로 읽는 방법이다.

흑양(黑壤)군을 거물나(今勿奴)라고 읽었는데 黑에서 뜻 ‘검을’을 취하고 壤에서 ‘나’(옛말에 땅을 뜻한다. 나라가 그 예이다.)를 취해 원래의 뜻과 소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을 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한자를 빌려 쓰는 민족에게 보편적인 표기법이었으므로 우리만의 표기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재 일본어는 이러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신라 향가가 일본인에 의해 먼저 해독된 것은 이러한 까닭으로 인한 것이다.

오쿠라신페이가 향가를 보고 일본 한자를 읽는 방식으로 우리말을 대입해서 그 뜻을 풀어 냈다.

참으로 뼈아픈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방식을 그들은 쓰고 있기 때문에 유리한 점을 갖고 있을 뿐이고 우리는 더 발달된 방식인 한글로써 충분히 더 뛰어난 말글살이가 가능하다.

양주동이 그 뼈아픈 부끄러움을 회복하려 다시 이두를 풀어 냈지만 오쿠라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 시가집 만엽집(만요슈)을 재일 동포 작가 김영희씨가 풀어낸 것은 백년전의 치욕을 씻은 멋진 한방이었다.

한자의 뜻으로도 일본말로도 풀어지지 않는 만요슈를 우리말을 집어 넣어 이두식으로 읽으니 뜻이 풀어진 것이다. 마치 오늘날의 한류처럼 신라의 문화가 전해져 향가로 노래하는 것은 하의 문화 콘텐츠였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학자가 아닌 작가여서 완전히 정확하게 풀지는 못했으나 큰 줄기에서는 그 뜻이 풀어져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열광한 바가 있다.

돌이켜 보면 신라나 계림이라는 말도 당시 쓰던 한자말이 아니라 ‘셔블’을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새 신과 벌릴 라의 뜻을 읽어 신라를 새벌로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세월이 지나며 한자의 음과 섞여 쓰이고 마치 지금은 한자의 소리만 남아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신라란 한자 소리만 남게 된 것이다.

노리사치개나 이사부가 오늘날 나타나면 자기 이름이 어떻게 읽혀야 하고 어떤 뜻인지 가르쳐 주겠지만 우리가 막 부르는 그 이름에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세종 큰 임금 덕에 지금 우리가 한글로 말글살이를 멋지게 누리고 있지만 그 전의 이두를 알아야 고대의 문화와 역사가 바로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