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산문 <95>
詩와 산문 <95>
  • 국토일보
  • 승인 2013.04.0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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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봉현(前 한국기술사회 사무총장)님의 산문집 ‘대통령 과학기술 대통령님’을 연재합니다

괴물보기 세상 일기

 
박 교수의 요청으로 영사모(영화사랑 모임)에 가입했다. 매월 한편의 영화를 관람하고 생맥주를 마시며 각자 감상평을 한다. 한 나절 즐기기에 넉넉한 모임이다. 심오 명 정도 모이는데 남성은 오명, 성비(性比)에서 심한 불균형이다. 여성들의 활약이 사회 전반적으로 약진하고 있음이 이 작은 모임에서도 드러난다.

영화를 보면 시대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내 또래 나이든 층들이 고정관념에 묶여 살아가고 있음도 알게 된다. 그리고 탄탄하게 굳어진 고정관념이 지고지선인양 강변하고 있음도 깨닫게 된다. 영화관엔 나이든 사람들이 드물다. 세상의 흐름에 대한 메시지가 전달되는 영화관에서도 세대 간의 간극이 느껴진다.
관객 일천만 명을 넘어선 국산영화가 네 번째 떴다. 국민 네 명당 한 명이 영화를 보았다면 대단한 흥행 아닌가. ‘괴물’은 관객 동원에도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구한말과 연계돼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본과의 갈등을 그린 영화 ‘한반도’가 괴물의 쓰나미에 휩쓸려 묻혀 버렸다. 우리 국민이 많이 봤어야 할 좋은 영화인데 아쉽다.

2003년 ‘실미도’가 상영됐을 때 보수 성향의 국민들이 발끈했다. 인민국가가 흘러나오고 화면에 북한기가 펄럭이는 장면은 나도 섬뜩했었다. 그러나 나라가 망할 것처럼 일으켰던 이념논쟁의 파도는 일천만 관객의 성숙한 의식에 막혀 사그라졌다.

우리들의 눈부신 성장과 세계 속의 의연한 국가위상을 망각한 체 엿 생각에만 매달린 층이 여전히 두껍다. 배는 앞으로 나아가는데 칼이 떨어진 위치만 뱃전에 새겨 놓고 그 표시 아래 물밑에서 칼을 찾으러는 고사를 연상케 한다.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져 이념문제는 걱정할 만큼 심각하지 않다. 패퇴한 공산주의는 물론 어떤 논리나 이념도 스스로 걸러 낼 만큼 성숙한 것이다.

세계를 두 편으로 나눠 각을 세우던 냉전체제가 붕괴된 뒤 우리나라 말고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념문제로 시끄러운 곳이 없다. 보수정권에 염증을 느끼면 진보적 성향으로 변하고 전보정권이 실정하면 보수적 성향으로 변하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보편화 됐다.

우리나라도 그런 패턴으로 자연스럽게 국민정서가 흘러갈 것으로 본다. 어느 당이 정권을 잡아도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근본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004년 ‘태극기 휘날리며’는 형은 인민군, 동생은 국군으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남과 북을 균형있게 다루었다. 이념보다도 아우는 형을,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휴머니즘이어선지 이념논쟁에 끼지는 않았다.

펄펄펄 휘날리는 태극기처럼 일천만 관객을 훌쩍 넘어 괴물이 나타나기 전까지 최고 흥행기록을 보유한 작품이었다.

2006년 전반기에 일천만 명 돌파 영화 ‘왕의 남자’는 동성애를 담고 있다. 한 편으로 광대들이 줄을 타며 공연 사설(辭說)을 통해 왕 앞에서 부패한 관리들을 고발한다. “최고급품은 관리들이 먹고 그 다음이 등급품이 왕에게 진상된다”는 광대의 사설은 고관대작들의 가슴에 서늘한 냉기를 퍼붓는다. 부들부들 떠는 고관들의 아슬아슬한 장면이 일상에서 누적된 서민들의 답답함에 통쾌감을 준다.

‘괴물’은 폭발적인 흥행 기록을 세우며 돌진했다. 우리 영화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영화는 이념보다는 재미와 감성을 파고든 스토리와 아름다운 영상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영화 괴물은 용산 미군기지에서 쏟아 버린 독극물이 생태계를 파괴해 괴물로 출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전시작전통제권 이양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상영되고 있지만 ‘실미도’나 ‘웰컴투 동막골’ 처럼 이념 논쟁없이 일천만 관객을 훌쩍 넘었다.은퇴를 앞둔 미국의 지한파 중견의원이 우려와 서운함을 나타냈지만 논쟁이나 심각하 반미로 이어지진 않았다.

국민들 의사결정 흐름은 국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북한을 과도하게 위험 시 하거나 무조건적 친미 일변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이른바 좌파적 성향 때문은 아니다. 2차 대전 후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우방 미국을 몰라라 내동이치는 미숙아적 편견에서가 아니다.

높은 수준의 교육과 경제발전, 민주주의 성취로 변별력이 건강하게 자리하고 그 바탕에서 판단한다.
민주화 이후 대학가는 조용하지 않는가. 일부 한총련 학생들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일부 교수가 북한과 유사한 미국 비판을 하지만 국민들에게 파고들지 못하고 사그라딘다.

국민 대다수는 건전한 친미를 바탕으로 세계 속에 국가발전과 평화를 다지길 원한다. 보수든 진보든 지나친 주장을 내세워 고함치지 말고 시위하지 말라. 노동단체도 격렬한 파업을 삼가야 한다. 국민의 눈에 지나치다 싶으면 역효과로 이어진다.

변화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자연스런 흐름에 맡기라’는 것이 청중동원에 성공한 영화를 보며 읽은 세상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