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산문 <94>
詩와 산문 <94>
  • 국토일보
  • 승인 2013.03.2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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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송봉현(前 한국기술사회 사무총장)님의 산문집 ‘대통령 과학기술 대통령님’을 연재합니다

짧은 체험, 긴 여운

영화 ‘실미도’를 보다가 한국전쟁 때 배운 인민국 행진곡이 흘러나와 피톨이 요동치며 야릇한 전율을 일으켰다. 내 삶에 있어 북쪽 행진곡 두 편은 전쟁의 파편으로 박혀 뽑히지 않은 채 식물처럼 서 있는 노래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고흥반도는 남쪽 끝이다. 그곳까지 인민군이 내려와 점령했으니 대한민국은 동남쪽만 남아 바람 앞의 촛불로 깜박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름 방학이었는지 전쟁이 터져 휴교 했는지 기억만으론 명확치 않다.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들은 떠돌았지만 통신매체가 전무한 실정이어서 어린 나에겐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어째서? 왜? 전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삼년 전 여순사건 때 마을 사람들 십여 명이 죽고, 서당 흙벽을 뚫고 총알이 떨어졌을 때 훈장님은 긴장했다. 트럭에 외지인을 싣고 와 마을 앞산에서 집단 총살했고 소복한 청상과부가 살해된 남편의 무덤을 붙들고 하도 슬프게 울어 어린 내 가슴까지 적셨던 여순사건 때 같은 정경은 없었다. 혹독한 여순사건 공포에 비하면 육이오는 우리 고장에선 순하게 스쳐 갔다.

하루는 정자나무 밑으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고 동무들과 조잘대며 뛰어갔다. 오백년 넘은 세 그루 느티나무가 보름달처럼 둥글게 녹음을 이룬 그늘인데도 고온 다습의 무더위는 기승을 부렸다. 더위에 지친 학생들을 향해 지위를 유지한 선생님을 힘주어 외쳤다. 5?6학년은 풍천, 3?4학년은 송강, 1?2학년은 하남마을에 모여 학습한다는 것이다.

하남 마을 나무그늘 아래서 다른 마을 1?2학년과 섞여 노래를 배웠다. 며칠을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장백산 줄기줄기… ”,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 그 때 배운 두 곡은 그 뒤 부르지 않아도 잊혀 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노렸던 적화통일의 플랜으로 시행한 세뇌교육의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철통같던 공산체제는 종주국인 소련과 위성국가들이 기강도 없어 보인 자유발랄한 시장의 능률과 창조적 파괴에 밀려 허망하게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 났다. 오로지 북쪽에 ‘주체’란 이름표를 달고 초라한 얼음 조각만이 떠 있는 모양새다.

인민군이 쫓겨 간 뒤 젊은 청년 들은 국군에 징집돼 가며 트럭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를 불러댔다. 열한 살 위인 형님도 두 번인가 징집 됐다 돌아오길 반복했다. 종내 입대 후 헌병이 돼 휴가 나오며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징집돼 갈 때마다 어머님 눈가엔 이슬이 맺히고 심한 가슴앓이를 하셨다. 한 명의 전사자와 한 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마을에 전사 하신 분은 하필 수양집 형이었다.

어머님은 점쟁이 권고에 따라 액운을 면케 하려 가난한 신씨댁 수양아들이 되게 했다. 다섯 살부터 삼년 간 섣달그믐 밤과 대보름 밤이면 누님 손잡고 한 칸짜리 토막집인 수양 집에서 수양부모님과 삼남 이녀의 가족이 함께 잠을 잤다. 그 집 큰 아들이 전사한 기별에 나도 울었다. 난감수성이 예민하기도 하지만 자지러 질듯 한 수양아버지 기침소리를 들으며 좁은 방에서 몸을 비비로 잠든 사이 나도 모르게 수양 집에 대한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쌕쌕이 전투기 편대가 고막을 찢을 듯 굉음을 내며 머리 위를 스쳐 아스라이 사라지고 은빛 날개와 하얀 배를 드러낸 B29 폭격기가 낮게 날아오면 우르르 굴헝으로 숨기도 했다. 밀렸다 밀어 올렸다 다시 밀리며 한 많은 북쪽 이산가족이 된 피난 행렬이 이루어 진 것이다.

구십여 호 쯤 된 마을에 피난민 두세대가 배정돼 마을에서 공동으로 돕도록 했다. 웅진에서 왔다는 사십대 후반 쯤의 부부는 일남 이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아줌마는 살결이 희고 통통한 몸매에 항상 웃는 얼굴 이어서 귀티가 났다. 큰 딸 동옥은 뽀얗고 예뻐 동네 청년들 가슴을 설레기도 했다. 피난 온 아저씨는 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다.

내보다 어린 아들 동범은 이따금 놀러 와 나는 딱지치기를 하며 따뜻하게 놀아줬다.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보탰다. 순후한 인심과 칼로 자르듯 반듯한 예절, 아홉 명의 급제자를 낸 마을은 자랑스럽다. 동범 가족은 사탕을 사다 팔며 어렵게 살다가 도회로 간다고 떠난 뒤 찾아 온 일이 없었으니 동옥과 동범 이름만 내 뇌에 내장돼 거친 풍상에 씻기지 않은 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삼년간 전쟁은 엄청난 사상자와 재산 손실을 가져 와 가난 위에 재난을 덧씌웠다. 그리고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쪽은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십분 발휘해 후진국에서 선진국 언저리에 이른 금자탑을 세웠다. 북쪽은 울타리 속의 통제와 빈곤국가로 허우적거리며 이 밝은 세상에 국제 고아가 된 모습이다.

6.25의 불꽃으로 남쪽에선 혼미한 이념 갈등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잘살기’와 ‘민주화’ 두 정신으로 이어져 발전의 동기로 작동했다.

내게 한국전쟁은 짧은 체험이었지만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은 분단의 긴 여운은 이어지고 있다. 승자와 패자는 전쟁이 멎은 뒤 오십여 년이 흐르며 확연해 졌다.

한 때 지구를 삼킬 듯 높은 너울을 일으키던 공산주의는 빛과 힘을 잃었다. 통이로 가는 방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정립됐다고 본다. 하지만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혀 미묘하게 전개되고 있는 한반도의 난기류를 바로 보아야 한다.

오늘이 있기까지의 미국의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선 안된다. 그런데 민족화해를 정착시키는 과정에 이해가 상반될 수도 있다. 미국은 남북화해를 무기시장의 축소로 이어질까 걱정할 수 있다. 북한 핵을 구실로 외세에 둘러싸여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한반도의 정세는 묘연하다. 비교우위와 승자가 된 남쪽 국민들은 북을 향해 용서와 사랑의 가슴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미?중?일 등 강국을 상대하든 북한을 상대하든 간에 원칙에 입각해서 공조하고 반대할 건 반대하며 난관을 뚫어야 한다. 북핵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남쪽의 자본과 기술, 북쪽의 노동과 자연자원을 결합시켜 남북의 경제가 함께 상승하도록 해야 한다.

북한 당국자들은 잘 못 든 길을 과감하게 걷어차고 국제 기준에 맞는 보편적인 자세와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 협력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제 육이오의 아픈 상처를 기록하되 가슴에 응어리만 키우는 이념논쟁은 꾹꾹 매장해 버리고 평화적인 민족통합과 번영을 이야기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