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잊혀진 희생자들”
[기고] “잊혀진 희생자들”
  • 국토일보
  • 승인 2022.11.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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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국시설안전협회 회장 박주경

10월 21일, 성수대교 사고 희생자 위령비를 찾아가는 서울숲 길은 깊어가는 가을 정취로 가득했다. 너른 잔디밭에서는 병아리같은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차량을 이용해서 어렵게 몇 번 가봤지만 그 날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 걸어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포털사이트에서 알려준 대로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그런데 위령비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은 하나도 없고 막다른 곳 철조망 너머 도로를 가로질러 위치하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였다. 할 수 없이 성수대교 쪽에서 들어갈 수 있는가 하고 헤맸지만 결국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차로 이동해야 했다.

위령비는 원래는 공원에서 걸어갈 수 있었으나 2005년 강변북로 진출입 램프 설치를 하면서 회환의 성수대교도 보이지 않고 갑갑하게 고립된 섬이 됐다.

늦게 도착한지라 추모식이 끝나가고 있어서 나는 기초지자체에서 온 분들과 인사를 나눴지만 제사상을 차려준 시민단체 대표를 제외하고는 몇분의 유족들 밖에 없었다. 성수대교를 관리하는 광역지자체나 정부 주무부서, 그리고 안전관리를 총괄한다는 정부기관에서조차 조화를 보내거나 찾아온 사람은 전혀 없었다.

썰렁한 추모식에 그냥 돌아설수는 없어서 그들과 짧은 만남을 통해 억울한 사고로 희생된 무학여고 학생의 아버지가 고통 속에 힘겹게 사시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희생되신 분들은 갇혀진 영혼이 됐고 오직 슬픔과 트라우마는 유족들만의 것이 되고 말았다.

“비명에 가신 이들 애달프다. 부실했던 양심 탓이로다...

여기 통한의 다리 곁, 증언의 강 언덕에 오늘 부끄러이

조촐한 돌 하나 세워 비오니 님들의 크신 희생 오랜 날

깨우침 되오리니...”

이제는 원망과 분노에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그들을 세상은 관심조차 없고 희생은 깨우침이 되지 못하고 있다. 위령비에 있는 추모시를 읽으면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이 다가왔다.

우리는 더 높은 건물과 더 긴 터널, 더 거대한 교량을 건설하고 있다.

작은 기초지자체조차도 더 길고, 위험하고 짜릿한 출렁다리를 앞다투어 만든다. 이들 시설물이 ‘시설물안전법’ 등에 따른 위험시설물로 지정하고 적정 예산을 배정해 전문가에 의해 볼트가 풀리지 않았는지, 녹슬은 것은 없는지를 세심하게 관리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시설물 어디에도 ‘안전수칙’을 설치하고 사고의 위험성과 대피 방법을 알리는 표지판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태원에서 또다시 많은 인명을 앗아간 참사가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책임자를 처벌하자고 정파적 이익으로 성토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법적 책임만 묻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것이 반복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고는 또 다시 날 수밖에 없다.

사고가 난 후에 사고의 원인을 밝혀내고 관리들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사고를 막을 수 없다. 사회적 사고는 직접원인 뿐만 아니라 숨어있는 무수한 간접원인들이 응축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차’하는 위험한 상황을 빗겨가는 경우가 많다. ‘손실우연의 법칙’처럼 사고의 위험성은 늘 우리 앞에 있으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우연하게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나는 원인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와 대책을 논하고 국가 안전의 틀을 재점검해야하고, 제도의 정비와 책임있는 당국자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시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고현장과 가까운곳에 희생자 추모의 공간이 필요하다. 재난의 악순환을 막기위해서는 사고로 인한 희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겸허하고 진지해야한다. 추모의 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사고로부터 대비하고 대응해 회피하는 법을 배우고 체험하는 장으로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유감스럽게도 성수대교 위령비도 그렇지만 삼풍백화점 위령비도 그런 추모의 장소로부터 단절돼 있다.

독일의 베를린에는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있고, 미국의 맨해튼 사고 현장에는 9.11 테러 희생자 추모공간인 ‘9.11 메모리얼 기념관’과 같은 기억과 추모의 공간이 열려있다. 부끄러운 역사의 공간이지만 진심어린 추모를 통해 가신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는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진정한 추모가 될 것이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 할 뿐이다”라는 격언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혼은 스스로 기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영혼의 안식처에서 옷깃을 여미고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할 때, 상처는 치유되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산 교육의 장소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저 병아리같은 천진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공공의 안전에 대한 중요성을 체험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고 세상은 더 안전해지지 않을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 결핍된 안전은 더 이상 안전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