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談事談(시담사담)]익숙한 길, 새로운 길
[時談事談(시담사담)]익숙한 길, 새로운 길
  • 국토일보
  • 승인 2021.06.2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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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규 교수/강원대학교

[時談事談(시담사담)-이 시대 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익숙한 길, 새로운 길

김 선 규 교수
김 선 규 교수

내가 사는 경기도 구리(九理)시의 지명은 동구릉(東九陵)에서 유래됐다. 동구릉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포함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와 후비가 잠들어 있다.

그 동구릉의 주산(主山)이 구릉산(九陵山)이다. 보통 주산이라 하면 해발 500m 이상의 봉우리를 떠올리는데, 구릉산은 겨우 178m에 불과하다. 다만 구릉산 남동쪽 기슭은 매우 완만하고 폭이 넓으며, 앞쪽 탁 트인 벌판 너머로 왕숙천과 한강이 흐르니 배산임수(背山臨水) 명당임은 분명하다.

구리시 갈매택지지구는 구릉산 뒤편에 위치한다. 그래서 갈매에서 구릉산 정상까지는 북쪽 산기슭을 올라야 한다. 5년 전 이곳에 집을 짓고 이사 왔을 때는 입주민이 거의 없어 구릉산 오르는 길은 좁디좁은 한가한 오솔길에 불과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요즘, 갈매지구가 거의 완성돼 3만여 주민들이 살다 보니 구릉산 오르는 분들도 많아졌다. 그래선지 구리시청은 등산로를 넓히고, 돌덩이가 노출된 곳은 마포로 덮고, 경사가 급한 곳은 계단과 난간을 설치해서 제대로 된 등산로로 탈바꿈시켰다.

다만 정자에서 구릉산 정상까지 오르는 코스는 산허리를 빙 둘러 내리막과 오르막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 구릉산을 오르는 나는 체력단련보다 정자 옆 벤치에 앉아 변해가는 숲속 풍경과 날짐승 소리를 즐기는 편이다. 벤치에 앉아 북쪽 산기슭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정자에서 구릉산 정상으로 곧바로 오르는 코스는 없을까?’ 문득 떠올랐다.

그런데 구릉산 뒤편 그늘진 산비탈엔 낙엽만 가득할 뿐 발길 닿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어느 날 정상 가까이 등산로 옆 비탈길을 한 노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탈길은 낙엽이 쌓여 길인지 아리송했지만 정자와는 일직선 방향이었다.

“이 쪽에도 길이 있나요?” 물었더니 무심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하산길에 그쪽 방향으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발길이 뜸해선지 볼품은 없었고 가파른 돌벽들이 산재했다. 그마저도 서울 신내동 방향으로 한참 돌아 내려가니 고난의 행군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며칠 후 구릉산 중턱 정자에 앉아 산 정상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운동기구 뒤편 산비탈로 곧장 오르면 정상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궁리하다 그곳으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역시 산비탈은 낙엽과 부엽토로 발이 푹푹 빠졌다.

바람에 꺾여진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낙엽에 미끌어지며 비탈을 올랐다. 50여m 쯤 올랐더니 작은 산등성이다. 산등성이는 햇빛이 들었지만 크고 작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진을 치고 있고, 곳곳에 쓰러진 고목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냥 내려갈까?’ 망설이다 마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얼마쯤 올랐을까 지난번 노인이 알려준 좁은 산길이 나타났다. 정상이 눈앞에 보였다. 올라온 산비탈을 뒤돌아보았다. 낙엽과 부엽토를 치우고 작은 잡목 가지를 꺾으면 산길이 될 것 같았다.

다음날 정자 처마에 끼워놓은 청소용 싸리 빗자루를 빼어 들고 어제 올랐던 산비탈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올라서인지 처음보다 훨씬 수월하게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오며 싸리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내기 시작했다. 낙엽이 쓸려진 자리는 까만 부엽토가 들어나 마치 산길 같았다.

정자까지 낙엽을 쓸고 잔가지를 꺾으며 내려오니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가뿐 숨을 몰아쉬며 정자 벤치에 앉아 낙엽 쓸고 내려온 산비탈을 올려다 보았다. ‘뭐 이렇게까지 하지?’ 괜히 쓴웃음이 나왔다.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새로 만든 길을 오르내리며 발자국을 남겼다.

대여섯 번 오르내렸더니 어느새 산길처럼 다져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중턱에서 운동하시던 분들이 내가 만든 새 길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신기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새 길은 제법 틀이 잡혔다. 내친김에 집 창고에 있던 삽, 곡괭이, 톱을 들고 나섰다. 산비탈의 경사진 길을 평평하게 만들고, 가파른 곳은 계단식으로 흙을 파낸 다음 넘어진 고목을 잘라 옆으로 치워 길을 넓힐 요량이었다. 그렇게 몇 일 작업했더니 제대로 된 등산길 모양으로 가다듬어 졌다. 대신 자발적 노동에 허리는 끊어질 듯했고, 통증은 보름 이상 계속됐다. 자업자득, 누굴 원망하랴.

그런데 새로 생긴 길을 어떻게 알았는지 제법 많은 분들이 그 길을 오르내렸다. 참 흥미로웠다. 내가 만든 새 길은 익숙한 등산길에 비해 조금 어설프다. 계단도 난간도 없다. 다만 정상까지 돌아가지 않고 오르내리막이 없으니 빠르고 편리하긴 하다. 거기다 사람 손 타지 않은 숲속이라 분위기도 남다르다.

‘그래 사람들이 꼭 익숙한 길만 고집하지 않는군. 조금 어설퍼도 빠르고 편리하면,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군.’ 심심풀이 작은 시도였으나 의미있는 깨닫음을 얻었다. 비약 같지만, 우리 건설도 익숙한 길만 고집하지 말고, 새로운 길을 내고 그길로 과감하게 전진해서 건설선진국 정상에 올랐으면 좋겠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