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일보 현장 25時]“건축사사무소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위기다”
[국토일보 현장 25時]“건축사사무소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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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1.2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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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국토일보 건축분야 전문기자 / 건축사 / (주)이가ACM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설계산업은 철저한 주문생산 방식… 기술적 노하우·디자인 대가현실화 시급
“발주처 잦은 설계변경 등 당초 6개월 계약이 1년이상 ‘다반사’ 비용 보상 필요”

이 종 석 국토일보 전문기자 건축사/이가ACM 대표이사
이 종 석 국토일보 전문기자 건축사/이가ACM 대표이사

이미 널리 알려진 실험이 있다. 개구리를 팔팔 끓는 물에 넣으면 “앗 뜨거워” 하며 바로 튀어 나오지만, 미지근한 물에 넣고 서서히 가열하면 물이 끓을 때까지 온도변화를 인지하지 못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다.

비극적이긴 하지만 이런 일은 실험 뿐만아니라 우리사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살고 있는 시점에 건축설계를 주업으로 살아가는 많은 건축사들이 시름하며 비명소리를 내고 있다. 충격으로 인한 아픔이 아니고 오랜 시간 견디다 못해 지르는 비명소리이다. 개구리가 자신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끓는 물에 남는 것처럼, 현재 우리 사회에는 이런 상황에 직면한 분들이 점차 늘고 있다.

건축계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차치하고라도, 우리 건축산업에서 초기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건축사사무소의 상황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건축설계 분야는 다른 엔지니어링 분야와는 달리 낭만적이고 감수성과 예술성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기술과 공학적 사고로 접근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와 같은 분야이다. 또한 건축사사무소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건축가들에게 꿈을 심어주기위해 경험적 노하우를 가르치며 건축인의 일원으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큐베이터와 같은 역할을 해온 곳이다.

그러나 현재 건축사사무소의 지속성이 불투명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건전한 수익구조가 망가진 지 오래다. 어떤 사업이든 회사나 개인이나 수익구조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다. 이것으로 회사와 직원들의 미래가 같이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마다 사정은 각각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수익구조가 확보되지 않아 마치 ‘카드 돌려막기 식’의 프로젝트의 수행은 오랜 관행이 돼 버렸고,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을 받는다.

특히 설계대가를 적정하게 받느냐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이슈가 돼왔다. 갈수록 치열한 가격경쟁 속에 약 20년 전 외환위기 시절의 설계단가보다도 훨씬 적어진 설계단가로 ‘박리다매’식의 사무소 운영형태로 변해버렸다. 이렇다보니 일부 사무소는 거대한 공룡처럼 비대해졌고, 나머지 영세한 곳은 일감부족에 허덕이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설계에 수반되는 각종 인허가 절차와 심의, 인증절차에 따라 비용과 소요시간이 과거에 비해 몇배 늘어난 것이다. 이를 비용으로 환산하게 될 경우 건축사가 정상정인 업무를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현상공모에 의한 설계계약의 경우 발주처의 사정에 따라 잦은 변경, 심지어는 재설계의 경우도 빈번하며 이로 인한 지연과 인건비의 부담은 건축사사무소의 운영에 매우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당초 6개월간의 설계계약 기간이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돼 성과물을 완성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경우 비용에 대한 정산이나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시장에 불고 있는 노동대가와 근무환경, 근무시간의 제한 등은 아무리 전문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과 정신을 강요한다 해도 건축사사무소가 뛰어넘기 어려운 장벽이 돼 버렸다.

이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용역대가를 오로지 성과물 중심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다. 사업 과정의 수많은 변수와 이에 따른 소요시간과 비용 등에 대한 부담을 건축사사무소 만이 질것이 아니라 발주처도 함께 부담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

과거에 비해 사회구조와 여건이 상당히 바뀐 현 시점에서 투자 시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반영돼야 한다. 같은 성과물을 작성하는데 6개월 소요되는 경우와 1년 이상 소요되는 경우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택시운임의 경우 과거 시내교통 혼잡으로 인한 단순 거리제 방식의 모순을 시간·거리병산제로 개선한 경우에 비유할 수 있다.

흔히 설계용역비를 성과물에 대한 대가로만 보고 “도면 몇 장 그리는데 그렇게 많이 받느냐”고 불평하는 경우를 흔히 접하게 된다. 성과물은 도면 몇 장이 전부일 수도 있지만 도면을 작성하기 위해 투입된 많은 분야의 인력과 투자된 시간, 그들의 기술적 노하우와 디자인 대가를 제대로 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설계 산업은 철저하게 주문에 의한 생산 방식이기 때문에 대량 생산하는 제조업과 구분돼야 한다. 건축설계는 예술품과 같이 세상에 하나뿐인 목적물을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