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재강중(半在江中)
반재강중(半在江中)
  • 국토일보
  • 승인 2010.03.08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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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환의 세상만사] (주)삼미 대표이사 / 공학박사 / APEC 공인컨설턴트 / 기계기술사

요즈음 매스컴에는 세종市 문제가 큰 이슈로 보도되고 있다.

원안이 잘못됐다는 다수당과 원안이 옳다는 야당과의 의견대립은 1차전으로 결론은 못 내리고 국민들의 눈살만 찌푸리게 했는데 이제는 원안을 수정해야 한다는 다수당내에서의 공방이 2차전으로 한창 진행 중이다.

아마 야당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집권당인 다수당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대통령과 집권당의 국민신뢰가 땅에 떨어질 것이 뻔하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임기 중 가장 탄력이 붙을 2년차 초반에 발목을 잡힌다면 국정추진에도 탄력이 떨어질 것이므로 국회도 행정부도 그리고 국민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혜로운 결과를 기대해본다.

다음 이야기는 오늘의 현실과 비추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함께 곰곰이 생각해보자.

조선 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김 정의 시문집 노봉집(老峰集)에 반재강중(半在江中)이라는 말이 있다. 의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고려 말 장군 박순은 이성계의 옛 친구였다. 이 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 할 무렵 박 순은 지인관(知印官)으로 안주에 있는 최 영장군의 총 본부에 있었다.

이 때 박순은 어명을 띠고 이 성계에게 ‘어서 강을 건너가 요동을 치라’고 하였다. 일단 위화도에 간 박 순이 어명을 전하니 이 성계는 화를 벌컥 내며 그런 명령을 못 듣겠다는 서신을 써서주고 박 순더러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박 순은 죽을 각오로 최 영에게 이성계의 서신을 전달하고 도망가 버렸다.

나라가 바뀐 후 박 순은 태종 때 승추부사가 되었다. 여기서 태종은 예전일을 기억하고 함흥차사(咸興差使)로 내려 보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만 태조와 태종은 불화로 태조가 함흥에 내려가 수도로 돌아오지 않고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어쨌든 박 순은 함흥으로 내려가 이 성계에게 망아지에 대한 비유, 쥐도 자기 자식을 위한다는 비유로서 태조를 달랬으나 태조 이성계는 태종에 대한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다만 박 순에 대한 옛 정을 생각하여 다른 사신들 처럼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좌우에 있던 태조의 신하들은 박 순이 이곳의 사정을 낱낱이 본 이상 그를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박 순이 강을 건넜을 즈음 태조는 박 순을 죽이려 사람을 보내면서 만일 강을 건넜으면 죽이지 말고 돌아오라고 하였다.

태조 생각에는 박 순이 이미 강을 건넜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박 순은 강을 건넜을 만큼 충분한 시일이 있었으나 병으로 돌아오는 도중 며칠간 묵었기 때문에 이제 막 강을 건너던 중 태조의 사신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태조의 사신은 박 순이 반은 강에 있고 반은 배에 있었으므로(半在江中 半在船) 그대로 죽여 버렸다.